평안북도 의주 출생으로, 출생연도는 확실치 않으나 그가 동양극장을 개관할 당시 갓 30세가 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1905년을 전후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 철도호텔의 지배인으로 일하던 1926년 6월 덴카스[天勝] 예술단의 단원으로 평양에 공연을 온 무용가 배구자(裵龜子)를 만나 1929년 결혼했다. 결혼 직후 배구자무용연구소를 설립한 배구자의 매니저 역할을 하면서, 흥행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지방 순회공연을 비롯해 쇼치쿠[松竹], 요시모도[吉本] 흥행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일본 순회공연 등을 통해 상당한 수익을 거두었다.
1934년 홍순언은 영화 촬영기사 이필우(李弼雨)와 야쿠자 흥행사였던 와케지마 후지로[分島周次郞]와 동업해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동양극장을 건축하고, 1935년 11월 배구자 악극단의 공연으로 개관했다. 그는 소설가 최독견(崔獨鵑)을 지배인으로 임명하고, 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하던 홍해성(洪海星)과 전 토월회 단원이었던 박진(朴珍)을 연출가로 초빙했으며, 당대의 유명한 극작가, 배우들과 전속계약을 맺었다. 전속극단으로 청춘좌, 동극좌, 희극좌를 두었는데, 이후 동극좌와 희극좌를 통합하여 호화선을 발족시켰다. 조선 유일의 연극 전용 극장의 개관은 문화예술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았을 뿐 아니라 공연예술계를 일거에 제패하면서 숱한 화제작을 내놓았다. 동양극장의 명의도 개관 직후인 1936년 1월 와케지마로부터 그에게로 이전되었다.
홍순언은 동양극장을 경영하면서도 한편으로 아내가 순회공연을 할 때에는 동행하기도 했는데, 그는 부인 배구자의 일본 순회공연에 동행했다가 1937년 1월 19일 급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