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예명은 김한(金漢)이다. 중학교 4학년 2학기 때 집단 맹휴(盟休)에 참가한 일로 퇴학 처분되어 방황하던 중 이경손(李慶孫)을 찾아간 것이 영화계에 몸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이경손은 이경손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숙영낭자전」(1928)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당시 김인규는 미술부에서 일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로 중도에 일을 그만두고, 1928년 4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현 도쿄예술대학) 도안과를 다니던 중 1931년 여름방학에 잠시 귀국해 「방아타령」(김상진)의 미술감독을 맡으며 출연까지 겸했고, 24살이 되던 1933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극예술연구회, 춘추극장, 조선극장, 동양극장 등에서 무대미술을 맡았다.
1936년 경 경성촬영소(京城撮影所)에서 영화미술은 물론 출연도 겸했으며, 1937년에는 홍찬(洪燦), 서광제(徐光霽), 이규환(李圭煥) 등과 성봉영화원(聖峯映畵園)을 세우고 「군용열차」(1938, 서광제)에 출연했다. 성봉영화원이 최남주(崔南周)의 조선영화주식회사(朝鮮映畵株式會社)에 합병되면서 1938년부터 전속배우로 활동해 「새출발」(1939, 이규환), 「수업료」(1940, 최인규) 등에 출연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선해협」(1943, 박기채), 「병정님」(1944, 방한준) 등 군국주의와 관련된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해방 후에는 조선영화건설본부에 참여했고 이후 조직된 조선영화동맹 중앙상임위원으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중에 월북했다. 한국전쟁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