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촬영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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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영화사(首都映畵社)의 홍찬(洪燦)이 1957년 경기도 안양의 3만 3500평 대지에 건설한 촬영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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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수도영화사(首都映畵社)의 홍찬(洪燦)이 1957년 경기도 안양의 3만 3500평 대지에 건설한 촬영 스튜디오.
설립목적

1950년대 후반 영화 제작편수가 늘어남에 따라 기술 수준 개선이 필요하게 되어 현대적인 영화 제작 시스템의 상징인 촬영 스튜디오를 건립하게 되었다.

연원 및 변천

1956년 7월부터 미국과 일본의 영화계를 시찰하고 돌아온 몇몇 영화인들의 주도로 촬영 스튜디오의 건설이 가속화되었다. 미국의 아세아문화재단에서 원조 받은 기재를 관리하기 위해 세워진 한국영화문화협회(韓國映畵文化協會)의 정릉 스튜디오를 필두로, 「자유부인」(1956, 한형모)의 제작사인 삼성영화사(三星映畵社)의 군자동 삼성 스튜디오 그리고 수도영화사의 안양촬영소 등 1957년에만 무려 3개의 촬영 스튜디오가 동시다발적으로 건설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바로 경기도 안양의 3만 3500평에 달하는 대지에 건설된 안양촬영소였다. 다른 촬영 스튜디오들이 100~200평 정도의 소규모였던 데 비해 안양촬영소는 당시 동양 최대 규모였다. 한국 영화기술의 선구자였던 이필우(李弼雨)의 설계 하에 건설된 3개의 스튜디오(각 500평, 380평, 150평), 래보라토리(laboratory, 105평), 녹음실(60평), 소도구, 대도구 제작실(150평), 분장실(100평), 촬영장비 저장소(100평)가 있었다. 그리고 한꺼번에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중욕장(公衆浴場, 샤워 시설)과 300평의 식당(1500명 수용), 총 3300㎾를 출력할 수 있는 3개의 변전실(각 50, 30, 20평) 등의 부대시설까지 일개의 촬영 스튜디오라기보다 그야말로 ‘영화공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여기에 미국 MGM 영화사를 통해 들여온 미첼(Mitchell) NC 카메라 3대와 웨스트렉스(Westrex) 녹음 시스템 일체를 비롯해 당시로서는 다양한 최신식 기재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원조경제와 정부의 지원으로 영화 제작에 필요한 기반시설과 장비들을 갖춰나가던 당시 상황에서 이러한 규모의 촬영 스튜디어가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은 평화신문사의 사주이자 수도극장, 국도극장을 소유한 재력가 홍찬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로비의 결과였다. 하지만 홍찬은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인 첫 번째 작품 「생명」(1958, 이강천)과 두 번째 작품 「낭만열차」(1959, 박상호)의 흥행 실패로 수십억 원의 부채를 떠안게 되었고, 결국 안양촬영소는 1959년 4월 부도 처리되어 상업은행의 관리로 넘어갔다.

이후 선민영화사(宣珉映畵社)와 홍성기(洪性麒) 감독이 잠시 운영을 하기도 했고 1963년 이후로는 범아영화사(汎亞映畵社)가 맡기도 했지만, 1966년 9월 박정희 정권의 지원 하에 신필름에 인수되기 전까지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채 사실상 방치되었다.

당시 한국 최대의 메이저 스튜디오인 신필름에 인수된 안양촬영소는 1960년대 후반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또한 신필름은 안양촬영소 내에 신필름영화예술학교(현 안양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해 본격적인 영화인 양성 교육을 병행하기도 했다. 1970년대 닥친 한국영화계의 불황과, 과도한 제작편수, 무리한 합작, 제작인력의 비대화 등으로 인한 운영의 부실화로 신필름은 상당한 자금 압박에 시달렸고, 또한 정치권과의 불화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몇 차례의 부도를 맞으며 신필름은 안양영화주식회사, 신프로덕션 등으로 이름을 변경하여 그 규모가 축소되면서 1975년 11월 허가가 취소되었다. 또한 1978년 신상옥(申相玉), 최은희(崔銀姬) 부부가 납북되면서 안양촬영소라는 이름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영화제국 신필름: 한국영화 기업화를 향한 꿈과 좌절』(조준형, 한국영상자료원, 2009)
『한국영화사: 한 권으로 읽는 영화 100년』(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2007)
『한국영화사: 開化期에서 開花期까지』(영화진흥위원회 엮음,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집필자
안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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