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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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에 세워진 영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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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에 세워진 영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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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영화문화가 들어온 초엽부터 단성사(團成社)·조선극장(朝鮮劇場)과 더불어 있었던 영화관이다. 1912년 12월 서울 관철동 89번지에 일본인 하야시다(林田金次郎)가 설립하였는데, 2층 벽돌건물로 수용인원 1,000명 정도의 큰 극장이었다. 우미관의 전신은 황금연예관(黃金演藝館)으로, 그 발족은 1910∼1911년 사이로 알려져 있다.

우미관은 1913년 12월 9일에 개관1주년기념으로 참신기이(斬新奇異)한 사진을 택하여 본격적인 활동사진 흥행업을 벌이게 되었다. 원래 양화관(洋畫館)으로 출발한 우미관은 단성사와 조선극장이 자리잡기 전인 1910년대에 가장 활발히 활동하였다.

우미관의 개관 초기에는 가장 인기 있는 변사였던 서상호(徐相昊)를 주임변사로 하고 최종태(崔鍾泰)와 한규성(韓圭成)이 변사로서 활동사진 해설을 맡고 있었다. 또, 영사기사로는 뒷날 단성사 지배인이 된 박정현(朴晶鉉)과 우리 나라 최초의 촬영기사로서 영화기술의 개척자가 된 이필우(李弼雨)도 한때 몸담았다. 이 땅의 초창기 영화관들이 이처럼 영화인이 성장하는 온상이 되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대체로 1915년 무렵까지의 상영프로그램을 보면, 단편무성영화시대(短篇無聲映畫時代)여서 5∼10분 정도의 실사물(實寫物)과 희극(喜劇)·태서정극(泰西正劇)·태서인정극(泰西人情劇)·태서활극(泰西活劇) 등 10∼15권이 통상이었다.

상영필름이 길어지기 시작한 것은 서상호의 해설로 개봉한 미국영화 <200만불의 재산>(1만 2,000피트, 1914) 등이며, 그 밖에 8,000피트와 4,000피트짜리의 본편 필름에다 4, 5편의 단편을 함께 묶었다. 이러한 초기 단편물시기에 상영된 프랑스의 코미디언 막스 랑데 주연의 <막스의 실패>(1913), 미국의 코미디언 바스터 키튼 주연의 <신마록장군 新馬鹿將軍>(1913), 그리고 실사물 <셔클턴대좌(大佐)의 남극탐험>(1913) 등은 역사에 남는 명작이다.

무수한 단편무성영화 가운데에서도 당시의 관객들의 흥미와 인기를 휩쓸었던 것은 이른바 연속활극(連續活劇)이다. 이탈리아영화 <천마 天馬>(상권·중권·하권, 5,000피트, 1914), 미국영화 <로빙 후트>(상권·중권·하권, 5,000피트, 1914) 등이 그 시작이다. 이어서 프랑스의 연속활극 <프로티아>(1914)·<환토마>(1915) 등이 개봉되었고, 고금영걸사전(古今英傑史傳)으로 <나폴레온대제 일대기>(전10권, 1914)·<엘리자베스여왕>(전3권, 1914)이 상영되었다.

이러한 옛날의 활동사진을 보고 서울 장안의 관객들은 재미와 흥분으로 들끓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블루버드사(靑鳥社)의 인정비극 <탁류 濁流>(1915)나 <사회의 적(敵)>(1915) 같은 사회신파극도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이후 단성사·조선극장과 경쟁적인 흥행을 벌인 우미관은 주로 오락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우미관은 8·15광복 이후에도 종로구 관철동에 존속하였으나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

우미관은 1959년에 화재로 전소된 후 화신백화점 옆으로 이동하였고, 이후 2류 재개봉관으로 이름값만 유지하다가, 1982년에 폐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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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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