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영화제작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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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영화제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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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48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영화제작소.
내용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하였는데, 정부의 영화제작과 배포, 그리고 공공기관 및 민간인의 영화제작에 대한 협조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대한민국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11월 14일에 공보처 공보국 현상과(現像課)로 설치되어, 「대한뉴스」와 문화영화 등 정부가 제작하는 영화에 대한 기술시설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56년 2월 7일에 공보실 공보국 현상과로 개편되고, 1958년 10월에는 흑백자동현상시설을 갖추었으며, 1960년 7월에는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 현상과로 개편되었다. 국립영화제작소로 발족한 것은 그 뒤 1961년 6월「정부조직법」제4조의 개정된 규정에 따라서였다.

1963년 11월에는 천연색현상시설, 1978년 5월에는 엑타크롬현상기(Ektacrome 現像機) 및 가색인화기(加色印畫器), 1981년 7월에는 VTR 시스템을 각각 설치함으로써 규모와 시설에 충실을 기하게 되었다.

영화제작소의 기구는 소장 아래 5개 과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 업무내용은 기획과 (기획·예산·서무·경리)·제작1과(대한뉴스 제작, 특보 및 기록영화 제작, 원판 보존)·제작2과(국내홍보영화 제작, 편집실 운영)·제작3과(해외홍보영화 제작, 녹음, VTR 전환복사)·현상과(현상 및 인화·영선)로 나뉘어 있었다.

1950∼1986년까지 「대한뉴스」는 1,621편이 제작되었고, 문화영화·기록영화는 1,692편이 제작되었다. 그동안 상당한 경험과 기술이 축적되어, 1960년부터는 문화영화와 기록영화 분야에서 국제영화제에 참가하여 40회 이상에 걸쳐 수상하였다.

1960년 제7회 아시아영화제에서 기획상을 받은 「뚝」을 비롯하여 「고려자기」(1977)·「한평생」(1979)·「한국인의 문화유산」(1982)·「한국의 매듭」(1985)·「열반」(1964)·「꽃신」(1979) 등은 대표적인 우수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1989년 이후 중단한 대한뉴스(1,694편)와 제24회 서울올림픽 공식 다큐멘터리 「손에 손잡고」(1989·임권택 감독: 120분)·기록영화·국내홍보영화·해외홍보영화 등 총 3,947편의 원판을 보관하고 있어 그 문화적 가치가 매우 크다.

1994년 국립영상제작소로 이름이 바뀌면서 제작한 국내외 홍보영화 및 기록영화는 1994년 48편, 1995년 26편, 1996년 29편 등 모두 103편이 된다.

1999년 국립영상제작소와 정부간행물제작소가 통합하여 국립영상간행물제작소가 되었다. 2004년 국립영상간행물제작소는 영상홍보원으로, 2007년 영상홍보원은 한국정책방송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국립영화제작소는 기록영화 분야가 취약한 우리나라에서 명실공히 그 대종으로서 발전해왔다는 데 큰 뜻이 있으며,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여 영화계와 사회 각 분야에 배출하였다.

참고문헌

『국립영화제작소연혁』(국립영화제작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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