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자는 1915년 일본 예인 단체 천승(天勝, 덴카츠)에 입단하여 1918년 무대에 데뷔하였고, 1926년 천승을 탈퇴했다. 천승에서 활동하는 시절에 배구자는 뛰어난 미모와 풍만한 몸매, 조선인이라는 특징과 다소 신비한 출생 내력, 뛰어난 마술과 독창 실력 그리고 연기력(특히 ‘소공자’ 역할)으로 주목받았다. 조선 방문 공연에서 배구자의 이러한 진가는 크게 드러났고, 미국이나 구주 혹은 만주 공연에서도 그녀는 각광 받는 배우이자 무용인이었다.
배구자는 1928년 조선의 연예계로 복귀하려는 의향을 내비쳤다. 그 시초는 주2 공연이었다. 그녀는 2년의 은퇴기를 청산하고 독창과 무용으로 장곡천정공회당(長谷川町公會堂) 무대에 섰다. 또 1929년에는 연구소를 열었다. 이 연구소는 한동안 ‘배구자무용연구소’로 지칭되다가 간혹 ‘배구자예술연구소’로 불리기도 했으며, 1931년 이후에는 ‘배구자예술연구소’로 자주 불렸다. 한편, 배구자 일행에 대해서는 ‘배구자일행’이라는 명칭이 가장 폭넓은 시기에 걸쳐 사용되었고, 때로 ‘배구자무용단’이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다.
1935년 11월 경성 죽첨정(竹添井,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서 동양극장이 개관했다. 동양극장 측은 개관 공연에 배구자악극단을 초청했다. 이 개관 공연을 통해 배구자악극단은 동양극장을 일종의 소속사로 두었다.
배구자악극단은 동양극장 개관 공연에서 다양한 주31로 공연했는데, 이 중 특히 만극 「멍텅구리」 주34으로 20여 명으로 조직된 소녀 관현악단의 무대 연주 수종, 무용 5종, 한국 무용 「아리랑」, 주32, 주33 등을 공연했다.
한편 배구자악극단은 1930년대에 주35를 무용의 일반화 혹은 대중화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했다. 배구자악극단은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레뷰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일정한 방향성을 확보하였다. 즉 레뷰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조선적인 것’의 추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30년대의 문단과 예술계(영화계)에서 ‘조선적인 것’은 일종의 대체 미학으로 간주되었다. 그 중심에는 신문사 『조선일보』나 잡지 『문장』 같은 주요한 언론 기관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이 단체들이 주도하는 ‘조선적 가치’를 추구하는 움직임은 문화 운동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도 배구자의 1931년 1월 공연(혁신 제1회 공연)은 ‘순수한 조선 정조를 표현한 새로운 시험’이자 ‘조선 민요를 무용화하여 조선의 향토 예술을 무대에 비로소 소개’하는 자리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배구자의 공연 전략은 조선적 정조의 확대를 통해 새로운 레퍼토리 개발을 촉진하고, 이를 통해 관객의 관심과 관극적 흥미를 높이려는 의도를 아울러 포함하고 있었다. ‘배구자무용연구소’는 작품의 변화와 공연 전략의 방향을 이른바 ‘혁신’으로 대내외에 공표하였다. 이 시기부터 ‘배구자무용연구소’를 ‘배구자예술연구소’로 부르는 기사들이 빈도 높게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혁신 공표를 기점으로 자체 연구소 이름도 자연스럽게 변화를 겪은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는 1930년 전반기 배구자예술연구소의 전략적 변화를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