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2월에 창간되어 1941년 4월 통권 25호(1939년 7월 임시 중간호 포함 26호)로 폐간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에 김연만(金鍊萬), 주간 이태준(李泰俊), 제자(題字)는 김정희(金正喜) 필적의 집자(集字), 권두화(卷頭畫)·표지화(表紙畫)는 김용준(金溶俊)·길진섭(吉鎭燮)이 맡았다.
1939년 2월에 창간하여 7월 임시 중간호를 발행하였고, 1940년 6월과 8월 용지난으로 휴간하고, 1941년 일제 당국의 『문장』·『인문평론』·『신세기』 의 병합과 함께 ‘일선어(日鮮語)를 반분하여 황도정신(皇道精神) 앙양에 적극 협력하라.’는 데 불응하고 폐간하였다. 1948년 10월정지용(鄭芝溶)이 속간하였으나, 제1호로 종간하였다.
이 잡지는 『인문평론』과 함께 문학지의 대표적 수준의 잡지로 전 문단인을 망라하였다. 소설에 65명, 시에 46명, 시조에 10명, 희곡·시나리오에 8명, 수필에 183명, 평론에 59명이 등장한다. 친일적인 색채가 거의 없는 순수문학을 지향하였다.
국문학 고전을 수록하여 민족 문학 유산을 옹호 전파하였고, 서구 문화 도입에도 뜻을 두었다. 작품은 소설 162편, 시 180편, 시조 34편, 수필 183편, 희곡 6편, 시나리오 2편, 평론 119편 등이다.
또, 추천제를 두어 신인을 발굴하였으니 소설에 최태응(崔泰應)·곽하신(郭夏信)·임옥인(林玉仁)·지하련(池河蓮)·정진엽(鄭鎭葉)·한병각(韓柄珏)·선진수(宣鎭秀)·유운경(劉雲卿)·허민(許民)·임서하(任西河), 시에 이한직(李漢稷)·김종한(金鍾漢)·박남수(朴南秀)·박두진(朴斗鎭)·박목월(朴木月)·조지훈(趙芝薰)·박일연(朴一淵)·조정순(趙貞順)·최남령(崔嵐嶺)·허민(許民)·황민(黃民), 시조에 조남령(曺南嶺)·김영기(金永起)·김상옥(金相沃)·이호우(李鎬雨)·장응두(張應斗)·오신혜(吳信惠) 등이다.
국어국문학상의 눈문 및 자료의 제공도 지대한 업적이다. 이희승(李熙昇)의 「조선문학연구초 朝鮮文學硏究抄」(총 3호·1939.4.), 이태준의 「문장강화 文章講話」(창간호∼총 9호), 송석하(宋錫夏)의 「봉산가면극각본( 鳳山假面劇脚本)」(총 17호, 1940.7.), 조윤제(趙潤濟)의 「조선소설사개요(朝鮮小說史槪要)」(총 18호, 1940.9.), 손진태(孫晉泰)의 「무격(巫覡)의 신가(神歌)」(총 18호), 조남령의 「현대시조론(現代時調論)」(총 19호, 1940.10.) 등이 있다.
또한 이병기(李秉岐)의 「조선어문학명저해제 (朝鮮語文學名著解題)」(총 19호), 양주동(梁柱東)의 「사뇌가석주서설(詞腦歌釋注序說)」(총 21호, 1940.12.), 정인승(鄭寅承)의 「고본훈민정음(古本訓民正音)의 연구」(총 21호, 1940.3.), 조윤제의 「설화문학고(說話文學考)」(총 24호, 1941.3.), 최현배(崔鉉培)의 「한글의 비교 연구」(총 25호, 1941.4.) 및 자료 「춘향전집」(고사본·고본·고대본, 총 21∼25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