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진섭 ()

길진섭
길진섭
회화
인물
해방 이후 「옹진바다 전망」 · 「농촌의 모녀상 」 · 「바닷가 풍경」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7년 2월 20일
사망 연도
1975년 9월 7일
출생지
평양
관련 사건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목차
정의
해방 이후 「옹진바다 전망」 · 「농촌의 모녀상 」 · 「바닷가 풍경」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3 · 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길선주(吉善宙) 목사의 아들이다.

1921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한 후 미술에 뜻을 두고 서울에 올라와 미술수업을 받았다. 이 시기 「풍경」(1921), 「얼굴」(1921), 「자화상」(1924), 「대동강이 바라보이는 풍경」(1925) 등을 서화협회전람회에 출품하였다.

1932년 일본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서울에 정착하였고, 1934년 이종우(李鍾禹), 장발(張勃), 구본웅(具本雄), 김용준(金瑢俊) 등과 양화단체 목일회(牧日會, 1937년 목시회로 개칭)를 조직하고 전람회를 열면서 1930년대 미술운동을 주도하였다.

1939년 창간된 문예지 『문장』의 디자인 편집위원을 담당했다.

해방 전까지는 간결한 필치와 풍부한 감화력을 보여주는 여인, 꽃, 풍경 등을 그렸으며, 윤희순(尹喜淳)으로부터 ‘현대적인 표현감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46년 서울대학교가 개교되자 미술학부 교수로 취임하였고, 미술계 움직임에도 적극 참여하여 조선조형예술동맹 부위원장, 조선미술동맹 서울지부 위원장 및 중앙위원장을 지내면서 미술계의 좌파를 이끌었다.

1948년 8월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가 열릴 때에 남한의 미술계 대표로 밀입북하여 참가하였고 제1기 대의원으로 피선되었다. 이 시기 북한에 정착하여 평양미술학교(뒤에 대학으로 승격) 교원,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작품활동은 정치적인 주제화들 외에 「옹진바다 전망」(1956), 「종달새가 운다」(1957), 「농촌의 모녀상」, 「금강산 신계사 가는 길에」(1962), 「바닷가 풍경」(1966) 등 풍경화와 인물화를 많이 남겼다.

작품활동과 함께 문필활동도 병행하여 『조선미술』에 「변모되어가는 농촌현실에 대한 예술적 파악」, 「구도에 대한 소감」등의 논문을 남겼다. 북한에서 길진섭은 당의 주체적 문화사상과 문예방침에 맞추어 사상․예술적으로 우수한 작품을 창작하여 조선미술 발전에 이바지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참고문헌

『한국근대회화선집-북으로 간 화가들』(금성출판사, 1990)
「간결한 필치로 심리적 충동 예리하게 일반화한―‘길진섭’화백」(『통일한국』293, 2008)
『한국근대회화선집-북(北)으로 간 화가들-』(금성출판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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