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모더니즘과 한국의 전통을 융합시킴으로써 한국적인 서양미술 양식을 찾고자 노력한 양화가 단체이다.
설립 당시 설립 취지나 목적을 밝히지 않고 조직되었다. 그러나 목일회 회원들의 활동상황과 작품경향으로 보아 이들이 서구 모더니즘과 한국의 전통을 융합시킴으로써 한국에 적합한 서양회화 양식을 찾으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목일회 회원들은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의 아카데미즘에 반대하며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을 거부하였다. 이는 목일회 회원들이 객관적이고 이성적 시각의 ‘서양의 아카데미즘’을 거부하고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동양의 정신’을 서양화의 재료로 표현하려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목일회 회원들은 후기인상주의 이후 서양 미술사조의 흐름이 동양 미술의 핵심인 주관적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입체파, 야수주의, 표현주의, 상징주의 등 작가의 주관을 강조하는 표현주의적 경향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전통회화에서 찾아낸 조형적 요소, 즉 기운생동 하는 선, 비입체적 형태, 얇은 채색 등을 통해 한국적 서양회화 양식을 구현해 내고자 했다.
1934년 5월 이종우(李鍾禹), 이병규(李昞圭), 송병돈(宋炳敦), 김용준(金瑢俊), 황술조(黃述祚), 구본웅(具本雄), 김응진(金應璡), 길진섭(吉鎭燮) 등이 조직한 단체이다. 이들은 대부분 1930년 결성되었던 백만양화회(白蠻洋畵會)의 동인이었음으로 목일회는 백만양화회의 후속 단체로 볼 수 있다.
목일회는 1936년 1월 이후목시회(牧時會)로 이름을 바꾸고, 1937년 6월 화신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이 전시회에는 기존 목일회 회원 중 김응진과 송병돈이 빠지고 백남순, 임용련, 장발, 이마동, 신홍휴, 이봉영, 홍득순, 공진환이 새로이 참가한다. 목시회는 전시 직후 해체를 하지만 송병돈을 포함한 기존 회원 12명은 1937년 겨울 화신화랑에서 ‘동인전(同人展)’이란 이름으로 전시회를 개최한다.
기존 목일회와 목시회의 동인들은 1938년 11월과 1939년 7월에 화신화랑에서 ‘양화동인전(洋畵同人展)’을 개최하였다. 1939년 ‘양화동인전’ 관련기사에는 ‘제5회전’이라 명시되어 있는데, 이는 목일회, 목시회, 동인전, 양화동인전 전람회 수를 합산한 것이다. 따라서 회원의 구성으로 볼 때 백만양화회의 후속 단체로 출발한 목일회는 목시회, 동인회, 양화동인전으로 명칭을 바꾸어 가며 1939년까지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전통미술에 대한 탐구를 통해 한국적 유화 표현법 탐구했으며, 관전(官展)인 조선미술전람회에 반대하는 재야단체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적 측면을 보여준다.
목일회 1회전: 1934년 5월 16∼22일, 화신화랑
목시회전: 1937년 6월 10∼17일, 화신화랑
동인전: 1937년 12월, 화신화랑
양화동인전: 1938년 11월 23∼27일, 화신화랑
양화동인전: 1939년 7월 1∼5일, 화신화랑
근대기 새로운 외래문물로 유입된 서양화를 주체적 입장에서 수용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서양화가 단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