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조 ()

회화
인물
일제강점기 「초춘」, 「풍경」, 「언덕길」 등을 그린 화가. 서양화가.
이칭
이칭
우현(又玄)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6년(고종 43)
사망 연도
1969년 8월 24일
출생지
대구시 덕산동 104번지
정의
일제강점기 「초춘」, 「풍경」, 「언덕길」 등을 그린 화가. 서양화가.
개설

대구 출신이며 호는 우현(又玄)이다. 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23년부터 미술전람회에 참여하였다. 대구 최초의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자이자 대구 지역 최고의 양화 개인전을 열었던 향토 화단의 선구자이다. 또한 「영과회」, 「향토회」의 창립회원으로 대구화단을 주도하였다.

생애

대구시 덕산동 104번지에서 박성문의 2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1920년대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가서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일본인 유화가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柏亭, 1882∼1958)에게 그림을 배웠다. 부인 주명심(朱明心)과의 사이에 3남 5녀를 두었다.

활동사항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었던 17세(1923년)에 교남서화연구회에서 개최한 ‘제2회 교남서화연구회전(대구미술전람회)’에 서양화부에 출품하였다. 1924년에는 대구에서 활동했던 화가 단체인 자토회(赭土會)의 ‘제1회 서양화전’에는 수채화 5점과 파스텔화 2점 출품했고, 1925년 ‘제2회 서양화전’에도 「풍경」등 5점을 출품했다. 1925년 6월에는 동아일보 대구지국 주최로 조양회관에서 열린 ‘양화 전람회’에 참가하였다. 또한 1926년에는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初春(초춘)」으로 입선하였는데, 이는 대구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화가로서는 첫 입선이었다. 이후 7회(1928), 10회(1931), 11회(1932), 12회(1933), 14회(1935)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여 총6회의 입선기록을 갖고 있다. 또한 박명조는 1926년 9월 23일부터 27일까지 교남기독교청년회관(嶠南基督敎靑年會館)에서 대구 최초의 양화 개인전을 가졌다.

1927년부터는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대구지역 예술단체인 영과회(零科會)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에는 대구지역 순수미술단체인 향토회(鄕土會)의 창립회원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박명조는 야외 풍경화를 주로 제작하였으며,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도 모두 야외풍경화이다. 그 외 정물화와 인물화도 제작하였다. 박명조는 수채화를 즐겨 그렸는데 맑고 투명한 수채화 기법을 사용하여 아카데믹한 자연주의 화풍을 구사하였다.

한편 대성학교, 오산학교, 대구상업중학교, 대륜중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미술교육가로서도 활동하였으며, 경상북도 지방서기, 대구일보사 지방부장, 키네마 극장 선전 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상훈과 추모

제5회(1926), 7회(1928), 10회(1931), 11회(1932), 12회(1933), 14회(1935)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

참고문헌

『조선미술전람회도록(朝鮮美術展覽會圖錄)』(경성: 조선사진통신사, 1926∼1935)
『근대를 보는 눈-다시 찾은 근대미술』(삶과 꿈, 1999)
『근대를 보는 눈-유화』(삶과 꿈, 1997)
「대구화단의 서양화 수용 전개에 관한 연구」(김태곤, 영남대 석사학위논문, 2004)
「향토회와 대구화단」(윤범모, 『한국근대미술사학』제4집, 1996)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