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회 ()

회화
단체
1927년에 결성한 대구 최초의 한국인 서양화가 단체이자, 동요부와 시가부가 공존하는 종합예술단체.
이칭
이칭
영과회(零科會), 공과회(空科會), 0科會
정의
1927년에 결성한 대구 최초의 한국인 서양화가 단체이자, 동요부와 시가부가 공존하는 종합예술단체.
개설

이상춘(李想春), 이갑기(李甲基), 주정환(朱正煥), 김영호(金永昊)와 같은 프롤레타리아 경향의 작가와 서동진(徐東辰), 박명조(朴命祚), 최화수(崔華秀), 이인성(李仁星) 등의 아카데미즘 경향의 작가들이 함께 하는 예술단체이다.

설립목적

어느 과(科)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0科會’로 이름 짓고, 공과회(空科會)로 불렀다. 또한 과거의 진부한 미술을 그만두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뜻으로 영과회(零科會)로 표기한다.

연원 및 변천

1927년 여름 교남기독교청년회관(嶠南基督敎靑年會館)에서 ‘창립전’을 개최하였다. ‘제2회 영과회전’은 1928년 4월 조양회관에서 개최되었는데, 양화부와 더불어 동요부, 시가부가 함께 전시를 하였다. 양화부에는 서동진, 박명조, 최화수, 김용준, 배명학, 이인성, 이갑기, 이상춘, 주정환, 김성암김흥교, 등이 출품하였고, 동요부에는 이원수, 최순애, 서덕출, 김여수, 방정환, 한정동, 신고송, 임동혁, 윤복진, 시가부에는 이상화, 이원조, 남만희가 출품하였다.

1929년 조양회관에서 열린 ‘제3회 영과회전’에는 양화부, 동요부, 시가부 전시에 더해 시화전이 개최되었다. 프롤레타리아 계열에 의해 주도되면서 영과회는 일제의 탄압에 의해 1929년 ‘제3회 영과회전’를 마지막으로 해산된다.

기능과 역할

한국인들만 참여하는 문화행사로서 기성 작가 뿐만 아니라 대구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현황

창립전: 1927년 여름, 교남기독교청년회관(嶠南基督敎靑年會館)

제2회 영과회전: 1928년 4월 28일 ∼ 5월 2일, 조양회관

제3회 영과회전: 1929년, 조양회관

의의와 평가

한국인만으로 결성된 단체로 근대기 대구 미술문화형성에 기틀이 되었다. 영과회 해체 이후 좌익성향의 미술인들은 과료회를, 순수경향의 작가들은 향토회를 조직하였다.

참고문헌

「대구화단의 서양화 수용 전개에 관한 연구」(김태곤, 영남대 석사학위논문, 2004)
「향토회와 대구화단」(윤범모, 『한국근대미술사학』제4집,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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