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에 태어나 서울에 있는 중동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47년 5월 22일 명륜동 자택에서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참여했던 서양화가이다.
일본 유학 중에 일본 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에서 활동하였는데, 나프(NAPF, 전일본무산자예술연맹)에서 주최한 제4회 프로미전에 「일선(日鮮)프롤레타리아 단결만세」를 출품하였다. 귀국 후에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서 활동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서 활동하던 이상춘(李相春), 정하보(鄭河普)와 함께 서울 근논동 120번지 건물 2층에 조형미술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 활동으로 검거되었다가 석방되면서 중국 북경으로 가서 생활했으나 다시 검거되었다. 1945년조선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을 결성했으며, 1946년 결성된 조선미술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회 부위원장과 서기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조선미술가동맹 소품전에 「인천 여맹 고작대보고」를 출품하였다.
중동(中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던 1929년동아일보 주최 전조선학생작품전에서 「풍경」으로 입선하였다. 1934년 제13회 서화협회전, 1935년 제14회 서화협회전에 입선하였다. 제14회(1935), 18회(1939)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정물」과 「천단(天壇)」으로 입선하였다.
1947년 5월 동화화랑에서 개최된 제2회 춘기 조선미술동맹전에 같은 해 사망한 윤희순과 함께 특별 유작전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