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

연극
개념
20세기 무렵, 한국(조선)에 설립되기 시작하여 주로 연극이나 영화, 음악이나 무용 등을 무대 혹은 스크린에서 상연하는 데 사용된 시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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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극장은 20세기 무렵, 한국(조선)에 설립되기 시작하여 주로 연극이나 영화, 음악이나 무용 등을 무대 혹은 스크린에서 상연하는 데 사용된 시설물이다. 한국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극장이 20세기 전후에 들어섰다. 처음에는 일본 공연단과 극장주의 영향을 받으며 부산, 인천, 원산 등의 개항장을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경성, 대구, 평양 등과 같은 대도시에는 극장가가 형성됐다. 한국인들은 극장에서 새로운 콘텐츠를 접하면서 삶의 위안을 얻고 오락과 재미를 느꼈고, 소수의 선각자들과 예술가들은 극장을 근거지로 자기 예술 세계의 근간을 형성했다.

정의
20세기 무렵, 한국(조선)에 설립되기 시작하여 주로 연극이나 영화, 음악이나 무용 등을 무대 혹은 스크린에서 상연하는 데 사용된 시설물.
극장의 설립과 초기 극장

한국(조선)에서 극장이 도입된 시기는 연극이 도입된 시기와 대략 일치하며, 그 기원은 18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구의 근대 연극이 동양 사회에 유입되면서 일본에서는 이른바 ‘ 신파극(新派劇)’이 만들어졌는데, 신파극은 조선 내에 형성된 일본인 주1 지역을 통해 조선인 관객에게도 소개되었다. 조선의 연극인들은 서양 문화의 콘텐츠를 일본(인)을 통해 접하게 되었고, 차츰 콘텐츠의 모방을 거치면서 그것을 수용해 나갔다. 대표적인 인물이 임성구로, 그가 창설한 혁신단은 최초의 신파극을 공연한 극단으로 한국 연극사에 자리매김했다.

1903년 부산에는 행좌(幸座)가 운영되고 있었다. 행좌는 당시 지도에 그 실체가 분명하게 기록된 극장이다. 또한 1895년 ‘극장 취체 규칙’을 대입하면, 행좌의 설립 시기는 1895년까지 소급된다. 행좌 외에도 부산에는 1903년 송정좌(松井座)가 광복동에 존재하고 주2 부산뿐만 아니라 인천에도 극장이 있었다. 임성구가 혁신단을 이끌고 인천 방문 공연을 떠날 때, 인천에는 공연장이 있었다. 이 공연장이 근대식 첨단 극장은 아니었을지라도 인천에도 이미 극장이 있었고, 그곳의 사람들은 그 극장을 개선할 의지가 있었다.

서울에도 초기 극장이 등장하였다. 1902년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칭경예식(稱慶禮式)을 위해 희대(戲臺: 이후 협률사원각사)가 건립된 후 1907-1908년에 단성사, 연흥사, 장안사, 광무대 등의 사설 극장이 개관하였다. 이 극장들이 한국인(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극장이었다면, 서울 남부에는 일본인을 위한 극장들이 다수 나타났다. 극장은 1910~1920년대에 계속 확산되었으며, 1930년대에 이르면 중대형 극장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극장이 광범위하게 자리 잡았다. 극장이 대중적 시설물로 확산되고 자리 잡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조선의 문화적 정체성의 성장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적으로, 근대극 도입기를 지나면서 신파극이나 영화는 의미의 변화를 겪기 시작하는데, 일본(인)을 통해 수용된 신파극은 조선 연극의 방식으로 변화하고, 이 과정에서 조선의 대중극은 일본의 신파극과 다른 성격의 콘텐츠로 바뀌었음을 1930년대의 순회 공연에서 엿볼 수 있다.

조선 영화 제작사들의 노력과 시도 등으로 인해 무성 주3 후반기에 해당하는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조선의 대중들은 조선의 영화를 선택하고 관람하는 데 익숙해졌다. 1935년 조선어 발성 주4가 처음 등장한 이후에도 이러한 문화적 실천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주10 이후 서양 영화의 수입이 금지되고 상영이 제한되는 1930년대 후반에도 조선 영화에 대한 기대와 적극적인 관람으로 영화관의 위상과 영화 관람자의 수치는 하락하지 않았다. 어느 시점에서 조선의 영화는 외래의 것이 아닌 조선의 것을 상징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조선적인 것도 근대적인 것이 될 수 있고, 나아가 ‘근대’의 경계와 차이가 무화되거나 근본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인식(이해)을 확보하게 되었다.

극장의 용도와 활용

근대극 도입기에 극장의 주요한 건립 목적 중 하나는 공연 관람이었다. 공연 콘텐츠는 여러 형태로 나타났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장르는 연극과 영화였다. 특히 연극은 초기 극장에서 주요한 공연 콘텐츠였는데, 여기에는 신파극(1910∼1920년대), 대중극(주로 1930년대 이후), 소인극, 소년 소녀 가극, 아동극, 신극 등의 세부 장르가 있었다.

극장들은 영화 상영의 중요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특히 1920년대 중반,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극장들은 연극 공연보다 영화 상영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즉 많은 지역 극장들이 영화 상영을 중심으로 운영 방식을 바꾸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극장은 연극 공연이나 영화 상영 외에도 또 다른 용도를 가진 공간이었다. 즉 극장은 대민 공용 대회를 비롯하여 음악 연주, 무용 발표, 만담 대회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지역 극장은 중앙이나 해외에서 활동하는 무용가나 상업적 순회 공연을 하는 무용 단체의 공연장으로 활용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야담 대회도 간헐적으로 열렸다. 이외에도 체육 경기장이 따로 없는 지역에서는 극장이 역기, 권투, 각희(택견), 씨름 등의 각종 스포츠 행사를 개최하는 경기장으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극장은 지역민을 위한 복합적 용도로 쓰인 공간이었다.

극장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공의 장을 제공하고, 때로 공연 콘텐츠를 통해 여론 형성을 이끌기도 한 공간이었다. 극장에 몰려든 시민들은 토의와 토론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주6하고 타인의 의견을 수렴하여 공동의 의견을 도출하는 기대 효과를 도모하였다. 또한 중앙 정부의 일방적인 시책이나 불합리한 정책에 대해 지역민의 목소리를 결집하는 시민 대회장으로도 빈번하게 활용되었다. 전국의 어떤 극장도 지역민들의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 요구를 수렴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공적 장의 기능을 외면할 수 없었다. 대도시에서 주7에 이르기까지 극장의 이러한 사회적 기능은 거부할 수 없는 본연의 역할이었다.

극장 설립 유형과 운영자

초기 극장은 대규모 자본과 주변의 협조가 필요한 시설물이었으므로 다양한 방식으로 제안이 이루어지고 건립되고 운영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극장 설립의 유형을 몇 가지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은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개인 상인 소유 유형’으로, 부유한 주8나 관련 사업가가 이익 추구를 위하여 극장을 설립한 유형이다. 이 유형에서는 극장 설립자가 소유주가 되고, 자신의 뜻에 맞게 극장을 운영하는 사적 운영 원칙이 강하게 지켜졌다. 두 번째 유형은 ‘주식 회사 결성 유형’으로, 극장 건립을 위해 주식 회사를 설립하고 많은 이들의 투자와 협조를 통해 극장을 건립하는 유형이다. 세 번째 유형은 ‘문화계 인사 주도 유형’으로, 일반 사업가보다는 문화 관계자 혹은 지식인(지역 엘리트)이 건립을 주도하는 유형이다. 네 번째 유형은 주9 겸용 유형’이다. 이 유형은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지역 유일의 극장인 청주의 앵좌나 개성의 개성좌는 공회당 겸용 기능을 하며 상당한 공공 업무를 수행하였다. 지역에서 극장은 시청각 연행물을 상연하는 기능 외에도 다양한 사적 · 공적 · 단체 업무를 수행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극장 설립 초기인 20세기 전후 무렵에 극장 소유주는 대다수 일본인들이었다. 일본인이 소유한 극장을 제외하면, 조선인이 소유한 극장은 소수에 불과했다. 조선인이 소유한 극장으로는 서울의 단성사(1907년부터 1917년 이전까지)를 비롯하여 인천의 애관, 함경도의 원산관과 동명 극장, 대구의 만경관, 평양의 평양 제일관, 광주의 광주 극장 등 극소수의 극장들이 있었다. 또한 개성좌와 같이 설립 당시에 소유주가 일본인이었으나 이후 조선인으로 바뀐 경우도 있었다. 극장 소유주가 한국인으로 바뀐 것은 해방 이후의 일로, 일본의 식민 통치로부터 조선이 해방되자 일본인 소유의 극장들은 한국인 소유로 바뀌었다.

한편, 근대기 이후 영화관의 변화를 장기적으로 조망할 때 가장 큰 변화로 지적할 수 있는 점은 2000년대 이후 영화관들이 대형 회사에 통합되어 체인망 형태로 운영된 것이다. 이 거대한 변동 속에서 기존 영화관들은 단관으로서의 시세적 불리함을 이겨내고자 했으나, 전국적인 체인망을 구축하며 확장하는 멀티플렉스의 기세 앞에서 그 운명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극장의 시대적 변천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이다.

한국 극장의 특징

일제강점기 극장의 소재지는 주로 역, 항구 그리고 상권 중심지와 재개발 지역에 집중되었다. 그러다 보니 극장은 도시 계획의 수혜와 이점을 누리는 경우가 많았고, 이와 반대로 극장이 오히려 도시 개발을 이끌고 주변 지역을 상권으로 만드는 구심적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철도가 놓인 지역에는 역사 주변에 극장이 위치하면서 시가지 변화를 유도했고,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 주요 항구에는 사람들과 자본이 몰려드는 지점에 극장이 자리잡았다. 이처럼 극장은 도시화의 주요 기반 시설이였으며, 유동하는 인구의 더 효과적인 흡수를 위해 극장가가 형성되기도 했다.

지역 사회에서 극장은 공공시설이자 문화적 척도이면서 상징물이었다. 오래된 극장 시설을 보수하고 건물을 증축 · 개축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으며,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에 극장이 없는 것을 한탄하며 극장 설립을 촉구하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그만큼 극장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는 시설물이었고, 지역의 문화적 · 사회적 · 제도적 근간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했다.

20세기 전반기에 극장은 조선인들에게 특수한 의미가 있는 공간이었다. 조선인 사업가에게 극장은 일본인 사업가와 경쟁을 하면서 상업적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한편, 공공적 대의도 실천해야 하는 곳이었다. 또한 일반 개인들에게는 주기적 노동에서 벗어나 오락과 재미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찾고 싶어 하는 공간이면서, 또 현실 세계에서 한없이 자유롭지 못한 채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이중적 공간이기도 했다. 근대기 조선인들에게 극장은 상업성과 공공성 간의 타협점을 찾아야 한 곳이었고, 또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동시에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공간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 극장은 이러한 이중적 성격에서 벗어나 자본의 공간으로 편입되었다. 극장은 유희와 오락의 기능이 강해졌고, 이를 위해서는 자본의 투입이 확대되어야 했다. 결국 극장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의 문화는 서서히 퇴색했고, 그 과정에서 다목적 공간으로서 극장이 수행하던 기능은 영화관, 연극 극장, 강연장, 회의장, 연주회장, 미술관, 체육관, 경기장, 시도청, 시(구)민회관 등으로 이양되었다. 이제는 과거와 같은 공동체 문화에 기반한 극장의 다목적 활용은 폭넓게 발견되고 있지 않다.

극장의 의미

한국에 극장이 등장하는 시기는 개화와 식민의 시기와 일치한다. 서구와 일본의 문화와 제도가 유입되면서 극장은 한국(조선) 사회의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고, 한국인(조선인)들은 극장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극장은 분명 유희장이자 오락장이었지만, 동시에 계몽과 교육의 장이자 때로 집회와 시위의 장이기도 했다. 대중들은 그곳에서 대부분 웃음을 찾지만, 동시에 울음을 찾기도 하고, 어떨 때는 망연자실, 허탈함, 분노, 한을 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는 무엇이고, 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대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극장은 유희와 오락의 공간이자 사색과 질문, 대화와 토론, 사상과 주체성이 공존하는 교육과 철학의 공간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남석, 『조선의 지역 극장』 (연극과인간, 2018)
홍영철, 『부산근대영화사』 (산지니, 2009)
주석
주1

19세기 후반에 영국, 미국, 일본 등 8개국이 중국을 침략하는 근거지로 삼았던, 개항 도시의 외국인 거주지. 외국이 행정권과 경찰권을 행사하였으며, 한때는 28개소에 이르렀으나 제이 차 세계 대전 이후에 폐지되었다. 우리말샘

주2

홍영철, 『부산근대영화사』, 산지니, 2009, 17~19면 참조.

주3

인물의 대사, 음향 효과 따위의 소리가 없이 영상만으로 된 영화. 우리말샘

주4

화면과 함께 소리가 나오는 영화. 우리말샘

주6

주장이나 사실 따위를 밝히기 위하여 의견이나 내용을 드러내어 말하거나 글로 씀. 우리말샘

주7

외따로 뚝 떨어져 있는 궁벽한 땅.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교통이 불편하고 문화의 혜택이 적은 곳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8

마을이나 지역에서 명망 있고 영향력을 가진 사람. 우리말샘

주9

일반 대중이 모임 따위를 할 때 사용하기 위하여 지은 집. 우리말샘

주10

1937년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에서 비롯되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전쟁. 일본이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고 일으켰는데 1945년에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끝났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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