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장은 19세기 이후, 세계 자본주의 시장 체제 아래에서 조약을 체결하여 외국인의 내왕과 무역을 위하여 개방한 항구이다. 우리나라는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알려진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계기로 부산, 인천, 원산의 3개 항구가 개항장(開港場)이 되었으며, 이후 목포, 진남포(鎭南浦), 군산, 마산, 성진(城津), 용암포(龍巖浦) 등이 추가되었다. 개항장에는 관세를 징수하는 해관(海關)과 외국인 관련 사무를 처리하는 감리서(監理署) 등이 설치되었으며, 외국인이 거류하는 지역인 조계(租界)가 설정되었다.
개항장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넓은 의미의 개항장은 무역 행위가 벌어지는 항구 전체를 의미하는데, 이러한 차원의 개항장은 고대부터 존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碧灡渡)는 일찍부터 송나라 상인과 일본 상인을 비롯하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내왕하는 국제 무역항으로서 넓은 의미의 개항장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왜와의 무역을 위하여 부산포(富山浦) · 제포(薺浦) · 염포(鹽浦)를 개방하였는데, 이 3포가 넓은 의미의 개항장에 해당된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개항장은 자본주의라는 근대 경제체제의 출현 및 조약(條約)의 체결을 통한 만국공법(萬國公法) 체제라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수립에 기반하여 개방된 항구를 의미한다. 해안이 아니라 내륙에 마련된 무역 개방지는 개시장(開市場)이라고 하였다.
근대적 의미의 개항장은 기본적으로 서양세력이 세계로 진출함에 따라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즉 동아시아에서 근대의 개항장을 살펴 보면, 1840년에 발발한 아편전쟁으로 개항이 이루어진 중국의 홍콩 · 상하이 등 5개 항구 및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에 의한 흑선(黑船) 내항을 계기로 개방된 일본의 시모다[下田] · 하코다테[函館] 등이 있다.
조선은 19세기에 들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사건과 병인양요, 1868년의 오페르트 도굴사건, 1871년의 신미양요 등 잇달아 서구 제국주의 세력과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그 양상이 폭력으로 일관하여 도리어 백성들은 서양에 대한 적개심만 생겼고, 서구 제국들이 잇따라 개항을 통한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873년,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종료되고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면서 민씨 척족 세력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 민씨 척족 세력은 메이지유신의 왕정복고 사실을 통지하는 서계 전달 문제로 촉발되었던 일본과의 갈등 문제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후 1875년, 운요호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일본 측이 강화도로 대표단을 파견하여 통상조약 협상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76년 2월 27일, 전문(前文)과 총 12관으로 구성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가 체결되었는데 제5관에서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 · 함경도 중 통상에 편리한 2곳을 개항하도록 명시하였으며, 이에 따라 1876년에 부산, 1879년에 원산, 1880년에 인천 등 3개 항구가 개항되기에 이르렀다.
근대의 개항장은 기본적으로 근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수출입 무역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에 수반되는 중요한 문제가 바로 관세였다. 조선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6개월 뒤에 일본과 「조일무역규칙」을 체결하였다. 이 통상조약은 일본과의 무관세 무역으로, 조선이 근대적인 관세에 대한 개념과 지식이 없었기에 수출입품에 관세를 받지 않겠다고 하는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된 것이다.
일본의 의도대로 양국 간 교역이 확대되자 조선은 관세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고 1878년, 부산에 있는 해관(海關) 두모진(豆毛鎭)에서 수세를 시도하였는데 일본 측의 반발로 불발되었다. 1880년 김홍집(金弘集)의 제2차 수신사(修信使) 파견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일본과 관세 설정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882년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이 추진되면서 관세 문제가 재차 수면 위로 떠오르자 일본과도 1883년 통상장정을 개정하여 관세 징수가 결정되었다.
당시 중국의 관세 징수 기구는 해관이었는데,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내정간섭 상황에서 청나라가 파견한 묄렌도르프(P.G.Möllendorf; 한국명 목인덕, 1848~1901)가 조선 해관의 창설 작업을 주도하였다. 중국 해관의 특징이 해관에서 관세 징수를 담당하는 업무를 관할하는 세무사가 서양인으로 충원되고 있던 것인데, 조선 역시 이러한 체제로 출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3년 6월 16일에는 인천해관이, 6월 17일에는 원산해관이, 7월 3일에는 부산해관이 창설되었다. 조선 해관을 총괄하는 서울 소재 총해관의 책임자인 총세무사(總稅務司)는 묄렌도르프가 맡았고, 3개 항구 해관의 세무사 밑으로는 방판(幇辦), 배가 정박하는 것을 지정하는 업무를 맡은 지박소(指泊所), 화물을 검사하는 업무를 맡은 험화(驗貨), 여행객의 화물을 검색하는 업무를 맡은 영자수(鈴字手) 등의 직원을 두었다.
해관에서 징수하는 관세율은 각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함께 정한 세칙(稅則)을 기준으로 하였다. 해관은 관세 징수를 위하여 통관 화물을 검사하고, 콜레라 등 전염병 방지를 위한 검역 또한 시행하는 주체이기도 하였다. 그 밖에 해관에서는 한국에서 최초로 근대적인 기상 관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청국 해관의 경우 외국인 세무사의 업무 처리를 감독할 수 있도록 청국인 감독을 두었는데, 조선 역시 이를 준용하여 해관에 대한 관리 · 감독하는 책임자로 각 항에 감리(監理)를 두었다. 1883년 8월 20일에 「감리통상사무설치사목(監理通商事務設置事目)」이 제정되었으며, 부산 감리에 이헌영(李𨯶榮), 인천 감리에 조병직(趙秉稷)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1881년에 조사시찰단(朝仕視察團)의 일원으로 일본의 세관(稅關)을 시찰하였던 경험이 있었다.
원산의 경우 다른 두 항구에 비하여 사무가 간단하였기 때문에 당시 원산부사(元山府使)인 정현석(鄭顯奭)이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후 이러한 겸직 체계는 다른 항구로 확대되어 감리는 대체로 지방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감리는 명목상으로는 해당 항구의 총책임자로서 세무사보다 서열이 높았지만 관세행정과 관련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세무행정에 간여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감리가 책임자인 감리서(監理署)는 점차 해관 감독 기능보다는 개항장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관련된 각종 사무를 처리하는 부서로 특화되어 갔다.
개항장에서 외국인 관련 주요 사안으로 범죄를 심판하는 문제가 있는데, 이는 바로 영사재판권과 관련된 문제였다. 동아시아에서 이루어진 개항에서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불평등조약이다. 즉, 만국공법 체제 아래에서 체결되는 조약은 기본적으로 체결 대상국의 상호 평등성을 전제로 하지만, 실제 내용은 한쪽에만 유리한 요소가 존재하였다. 그 대표적인 내용이 바로 영사재판권, 즉 치외법권이었다.
조일수호조규 역시 제10관에 영사재판권이 규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부산 · 인천 · 원산의 3개 개항장 모두 일본인 거주 지역에 영사재판권이 적용되어 우리나라는 일본인의 범죄를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갖지 못하였다. 이는 이후 개항된 여타의 개항장 및 미국 · 영국 등 서구 열강과의 조약 체결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외국인 관련 범죄가 발생하면 사건 당사자 및 양국의 관리들이 모여서 변론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이를 청심(聽審)이라고 하였다. 조선은 직접적인 심판권은 갖지 못하였으며, 청심이 개최될 때 조선측 관원 대표로 대개 감리를 참석시켰다.
외국인과 관련된 또 다른 중요 사안은 바로 조계(租界) 문제였다. 조계는 외국인 전용 거주 구역으로 설정된 지역으로서, 개항장에 청이나 일본, 서구 열강 등 각 국가별로 있었는데, 청이나 일본은 대체로 전관거류지(專管居留地)인 단독 거류지를 설정한 반면, 여타 국가들은 경우에 따라 단독 또는 공동 거류지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조계 내의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국가별 대표들이 모여 논의하는 자치기구로 신동공사(紳董公司)라는 것이 설치되어 운영되었으며, 역시 조선 측의 감리가 구성원으로 참석하였다.
한편 조계 외에 외국인과 관련된 주요 사안으로 개항장으로부터 통행할 수 있는 거리의 한도를 의미하는 간행이정(間行里程)이 있었는데, 외국인이 이 범위를 벗어나면 처벌 대상이 되었다. 간행이정은 조일수호조규에서 10리로 규정되었다가 일본 측의 요구에 따라 1882년에 체결된 조일수호조규속약에서 100리로 확장되었다. 이는 이후로 체결한 여타 국가들과의 조약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개항기에 접어든 우리나라는 1876년에 일본을 필두로 1882년에 미국, 1883년에 영국 · 독일, 1884년에 러시아 · 이탈리아, 1886년에 프랑스, 1892년에 오스트리아, 1901년에 벨기에, 1902년에 덴마크 등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점차 세계 자본주의 무역체제로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개항장 또한 증가하였는데, 갑오개혁기까지는 부산 · 인천 · 원산의 3개 항구 체제가 유지되다가 대한제국 출범 직전인 1897년 10월 1일에 전라남도 목포와 평안남도 진남포가 추가로 개항되었다.
이후 1899년 5월 1일에 전라북도 군산과 경상남도 마산, 함경북도 성진이 개항되었으며, 이들과 함께 평양 등 내륙의 개시장도 증가하였다. 또한 러일전쟁이 벌어지던 1904년 3월 23일에는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의 용암포가 마지막으로 개항되었다.
한편 개항장의 행정 사무를 관할하였던 감리서도 여러 차례 제도적인 개편을 거쳤다. 해관 창설 초창기에는 관세수입 자체를 세무사가 관할하여 관세와 관련된 감리의 실권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1885년에 묄렌도르프의 후임 총세무사로 메릴(H.F.Merrill; 한국명 목현리, 1853~1935)이 부임하면서 해관과 감리서의 제도상 개편이 일어나게 되었다.
즉, 각 지역 해관의 외국인 세무사들에 대한 지휘권을 총세무사가 확보하고, 명목상이나마 이들의 상급자인 감리의 간섭을 배제시키는 대신에 관세수입에 대한 관리권을 감리가 행사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86년부터 관세 수입의 관할권을 갖게 된 감리서가 독립관서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감리와 해관 세무사는 상호 평등한 이원체계를 형성하였다.
메릴의 부임은 해관의 제도적인 정비에 있어서도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87년, 전문과 2장 23조로 구성된 「조선해관잠행세무장정(朝鮮海關暫行稅務章程)」이 제정되어 해관 업무에 대한 세세한 규정이 마련되었고, 1888년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아울러 비슷한 시기인 1886~1889년에 걸쳐 해관의 창고, 선박의 정박 및 검사, 전염병 예방 등 여러 부문에 걸친 규정들이 잇달아 제정 · 시행되었다.
감리서는 갑오개혁기인 1895년에 재정 절감을 명분으로 일시적으로 폐지되었다. 1896년에 「각개항장감리복설관제규칙(各開港場監理復設官制規則)」을 제정하면서 복설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해관에 대한 관리 · 감독의 기능은 상실하고 개항장의 외국인 업무 전담 관서로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이후 감리의 비외교 업무에 대한 겸직을 금지하는 규정이 포함된 「각항시장감리서관제급규칙(各港市場監理署官制及規則)」이 1899년에 제정되었다. 1903년에 감리가 겸임하던 지방관직이 분리되며 순수한 외국인 교섭 업무만 관할하게 되면서 감리서는 외국인 업무에 보다 특화된 관서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리고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이후인 1906년에 부윤(府尹)에 업무를 넘겨주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개항장은 대외무역이 이루어지며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는 장임과 동시에 제국주의 열강 국적의 외국인들이 토지나 가옥 등을 침탈하는 현장이기도 한 이중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이러한 외국인들의 횡포로부터 개항장의 자국민을 지키는 데에 무력하였다. 다만 현장의 감리들 중 러시아와 일본의 고하도(高下島) 침탈에 맞섰던 진상언(秦尙彦)처럼 자국민 보호에 노력하였던 경우도 일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