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고종 1) 함경도의 고원군수(高原郡守) 재직당시 치적이 높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삼가현감(三嘉縣監), 진주목사, 김해부사 등을 거쳐 1883년 덕원부사(德源府使)로서 원산감리(原山監理)를 겸하였다.
김해와 덕원에서 부사로 재직할 당시 양지역이 연해의 요충임을 고려, 이 지역의 방비와 교육, 농잠, 광무(鑛務) 등을 위한 인재의 등용과 장려책을 조정에 건의하기도 하였다. 1886년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로 특별히 발탁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에는 황해도관찰사로서 봉산(鳳山)에서 전선을 절단한 장원석(張元石) 등을 효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정부로부터 견책을 받고 파직되었다. 일본 압제하의 친일내각에서 왕실에 가까운 인물들을 배제하는 과정에서 축출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