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발발 직후 국내외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등장한 7개의 임시정부 가운데 하나로, 민주공화제를 정체(政體)로 표방하였다.
수립 과정과 활동 상황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설립 즉시 활동이 억제된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정부에 대한 자료는 일제가 1919년 4월 17일평안도 철산·선천·의주·평양 등지에 살포된 전단을 압수, 수거하여 조사한 바에 실체가 확인될 뿐이다.
‘신한민국정부선언서’라는 제목으로 된 전단에서는, 정부 수립의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동양 평화를 계속 유지하며, 전쟁을 근절시켜 세계평화를 달성해야 할 사명감을 가지고 있음을 천명하였다. 또한 이러한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민간정부를 조직하고 약법(約法) 7개조를 규정, 반포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선언서 말미에는 집정관 이동휘(李東輝), 국무총리 이승만(李承晩) 이하 내무부장 미정, 외무부장 박용만(朴容萬), 재무부장 이시영(李始榮), 교통부장 문창범(文昌範), 노동부장 안창호(安昌浩) 등의 정부 부서와 각료 명단이 밝혀져 있다.
그런데 정부의 부서 가운데 나오는 집정관이나 국무총리와 같은 이름이, 당시 또 다른 임시정부인 한성정부(漢城政府)의 부서인 집정관총재나 국무총리총재와 비슷할 뿐만 아니라 각료 명단도 유사한 점으로 미루어, 두 정부는 추진 인물이 같았거나 아니면 긴밀한 연락이 취해지고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또한 국호가 상해의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의 명의와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보면 상해와도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특히 이 정부의 부장·차장이 거의 해외의 저명 인사들로 선임되어 있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정부를 해외에 수립할 의사를 반영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정부가 누구에 의하여 입안되었고, 선언서가 누구에 의하여 작성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어느 한인 지사에 의해 군주제의 결별과 함께 그 대안으로 민주정부 수립의 열망이 강하게 구체적으로 표방된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