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 ()

안재홍
안재홍
정치
인물
일제강점기 때, 조선일보 사장, 신간회 총무간사 등을 역임하였고, 우리나라 상고사를 연구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민정장관 등을 역임한 언론인 · 사학자 · 정치인 · 독립운동가.
이칭
민세(民世)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1년(고종 28)
사망 연도
1965년
본관
순흥(順興,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출생지
경기도 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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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조선일보 사장, 신간회 총무간사 등을 역임하였고, 우리나라 상고사를 연구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민정장관 등을 역임한 언론인 · 사학자 · 정치인 ·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민세(民世). 경기도 평택 출신. 윤섭의 아들로 어머니는 남양 홍씨이다. 일제 식민지기 시대일보 이사와 조선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고대사 연구에 몰두,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애썼다. 신민족주의론을 내세웠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에 단발을 하고 상경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중학부에 들어갔다. 이때 이상재(李商在) · 남궁억(南宮檍) · 윤치호(尹致昊) 등과 교분을 가졌다. 1910년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조선인기독교청년회에 계속 관여하여, 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조직, 활동하면서 1911∼1914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1915년 귀국하여 주로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1916년상해로 망명하여, 이회영(李會榮) · 신채호(申采浩)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서 활약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중앙고등보통학교 교감직을 역임하고, 그 해부터 조선 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를 지냈다. 1919년 동경유학생회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부(聯統府) 역할을 수행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3년 『시대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이사와 논설위원을 지내고, 1924년 『조선일보』 주필을 거쳐 부사장(1929∼1931) · 사장(1931∼1932)을 역임하여 10년 동안 언론인생활을 하였다. 이 동안에도 1925년에는 조선기자대회 부의장을 역임하고, 조선사정연구회 · 태평양문제연구회에 참여하였으며, 1927년 신간회 총무간사로 활약하다가 잡혀 8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같은 해 재만주동포옹호동맹(在滿洲同胞擁護同盟) 위원장, 1929년 생활개선운동 · 귀향학생문자보급운동을 벌이면서 광주학생사건 진상보고를 위한 민중대회를 주관하였다. 1932년에 만주동포조난문제협의회의 조사 · 선전부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조선일보』 시절에 겪은 일들은 글로 옮겨져 사설 980편, 시평 470편이 게재되었다. 이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간행 등 조선실학연구에 몰두하였다. 1936년 임시정부와의 긴밀한 활동이 탄로나 2년 동안 복역하였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다시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7년∼1944년 틈나는 대로 평택군 향리의 도릉산방(桃陵山房)에서 우리나라 상고사와 조선철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이는 일본학자들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였으며, 1945년 4월 일본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여운형(呂運亨)이 일본과 조국의 치안권인수문제에 관한 접촉이 이루어질 때 그 대안으로 민족대회의 결의를 받자는 주장을 폈다. 8 · 15광복과 동시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좌우되자, 같은 해 9월 독자적으로 국민당(國民黨)을 결성, 당수가 되었다.

그 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중앙위원 ·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1945년 10월 23일에 열린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1946년 한성일보(漢城日報)의 사장 · 비상국민회의 의원 · 민주의원 의원 · 좌우합작위원회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1947년 과도입법의원 의원이 되고, 미군정청 민정장관(民政長官)이 되어 한인체계에 의한 행정기반을 굳혔다. 정부수립 후 평택군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50년 9월 21일 납북되어 1965년 3월 1일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저서

저서로는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한민족의 기본노선』 등이 있다.

상훈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민세 안재홍 심층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황금알, 2005)
『한국현대인물사론(韓國現代人物史論)』(송건호, 한길사, 1984)
『민세안재홍선집(民世安在鴻選集)』 Ⅰ·Ⅱ(안재홍선집간행회 편, 지식산업사, 1981)
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http://search.i815.or.kr/Main/Main.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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