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지던 무렵 여운형(呂運亨)·조동호(趙東祜)·현우현(玄又玄)·황운(黃雲)·이석구(李錫玖)·김진우(金振宇)·이수목(李秀穆) 등이 주축이 되어 일본의 패망과 조국광복에 대비하기 위하여 국내에서 조직한 비밀단체였다.
이 단체는 1944년 8월 10일 국내의 사회주의자 일파들이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하여, 현우현의 집인 서울 경운동 삼광의원(三光醫院)에서 일본의 패망과 조국건설에 대한 논의를 거쳐 조직하였다.
그 뒤 이여성(李如星)·이만규(李萬珪) 등이 가담하여 조직이 더욱 확장됨으로써, 위원장 여운형 산하에 여러 부서를 두고 전국적인 조직망을 펴 많은 맹원을 규합하였다.
그들은 불문(不文)·불언(不言)·불명(不名)의 3대 원칙과, ① 각인·각파는 대동단결하여 건국일치로 일본제국주의의 모든 세력을 구축하고,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② 반추축제국(反樞軸諸國)과 협력하여 대일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것, ③ 건설부면에 있어서 일체 시정을 민주주의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동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 등의 강령을 내세웠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세포조직을 넓혀 그 보조단체로 여운형 주관의 농민동맹, 이옥향 주관의 부인동맹, 최현국·김사옥 등 주관의 청년노동자운동, 김종계·문규영 등 주관의 각급 학교 학생운동, 조원환·서재필·여용구 등 주관의 철도종업원운동, 조흥환·김동호 등 주관의 교원세포조직운동 등이 있었다. 그 밖에 박승환(朴承煥)을 중심으로 군사활동도 계획하였다.
1945년 8월 4일에는 이들의 활동이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조동호·이걸소 등 간부들이 붙잡혀 투옥되었다. 그러나 같은 달 11일에는 일본의 항복을 미리 알고 이만규로 하여금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게 하였다. 8월 15일 일본항복과 동시에 장권(張權)으로 하여금 치안대를 조직하게 하여 건국청년치안대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건국동맹이 본래 비밀조직이었기 때문에 조직활동의 혼란과 분열이 일어났으며, 광복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발족과 더불어 맹원간의 공로 다툼으로 말미암아 이 조직의 정통성은 깨어지고, 맹원들은 각각 여러 정당과 정파에 흡수되거나 분산되고 말았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된 뒤에는 서울 종로구 기독교청년회관에 별도의 사무실을 설치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파견맹원과 조선건국동맹본부 고수파가 함께 사용하였다. 그 뒤 건국동맹을 발전적으로 해체한다는 결의에 의하여, 1945년 11월 12일에 조선인민당이 결성됨으로써 사실상 해체되었다. →조선인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