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6일 사장 안재홍(安在鴻), 편집 겸 발행인 양재하(梁在廈), 주필 이선근(李瑄根), 편집부장 송지영(宋志英) 등의 진용으로 서울에서 창간하였다. 이 신문이 지향하는 바는 민족통일과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자주독립에 두었다.
창간호에는 ‘건국구민(建國救民)의 대사명’이라는 창간사 이외 이승만(李承晩)을 비롯하여 주한미군사령관 하지(Hodge, J.R.)중장, 군정장관 러치(Lerche, A.)소장 등의 축사가 실렸다.
사장 안재홍은 미군정하의 민정장관(民政長官)이었으므로 『동아일보』·『조선일보』와 함께 대표적인 우익신문으로 손꼽혔으며, 1945년 12월 29일에 결정된 신탁통치안에 대해서 앞장서서 반대하였다.
1946년 9월 25일 신문사 종업원들의 파업으로 인하여 서울의 모든 신문들이 9월 26일부터 휴간에 들어갔을 때, 이 신문은 10월 1일자부터 제일 먼저 복간에 들어갔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보수적인 논조를 폈다.
처음에는 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의 인쇄시설을 이용하여 인쇄하였는데, 1949년 2월 4일부터 인쇄상의 사정을 이유로 자진 휴간하였다가, 7개월 후인 9월 1일 제920호부터 속간하였다.
당시의 편집국장은 이관구(李寬求)였다. 6·25사변 전까지는 『동아일보』·『조선일보』·『경향신문』·『국제신문』과 함께 5대 유력지로 꼽혔으나, 사변 후 사장 안재홍이 납북당하여 신문도 속간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