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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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방송
단체
1921년에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언론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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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1년에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언론단체.
내용

문화보급의 촉진, 언론자유의 신장, 여론의 선도, 회원의 명예와 권리의 옹호 및 회원상호간의 친목도모 등을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창립 직후인 1922년 1월 26일 첫 월례회에서 신문과 잡지에 대한 검열 및 허가제도의 철폐를 위하여 노력할 것을 결의하였고, 한때는 정체상태에 놓인 적도 있었으나 1927년 중순까지 민족지의 구심점으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 가운데는 1925년 전조선기자대회를 개최한 것을 비롯하여 1924년 9월 조선기근대책강구회의 발기준비위원회와 그 운영에 주동적 소임을 담당한 것 등이 있다. 1926년 6·10만세운동 때는 학무국과 총독부의 수뇌를 탄핵하기 위한 결의문을 발표하는 등 순수한 언론활동 뿐 아니라 사회문제에까지 참여하여 여론형성을 주도하였다.

1924년 8월 국경지역인 평안북도 위원(渭原)에서 일본경찰의 만행으로 주민 28명이 학살당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무명회는 각 신문의 공동취재 대표로 『조선일보』의 이석(李奭)을 현지에 파견하여 상세한 진상을 조사하게 하는 등 그 취재활동이 활발하였다.

이 밖에도 민족지의 입장을 대변하는 여러 차례의 결의문을 발표하고, 취재기자가 구속당할 때는 경찰 또는 총독부 당국에 직접 항의하는 등의 활동과 함께, 일제의 언론정책에 관련되는 문제로서 「광무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출판법」 개정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참고문헌

『언론단체의 역할과 성장』-한국현대언론사론-(정진석, 전예원, 1984)
『일제하한국언론투쟁사』(정진석, 정음사, 1975)
집필자
정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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