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익 ()

목차
정치
인물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항일군정대학 교관, 화북조선독립동맹 부주석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부수상 등을 역임하다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된 관료 ·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최창석, 최창순, 최동우, 이건우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6년(고종 33)
사망 연도
1957년
출생지
함경북도 온성군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항일군정대학 교관, 화북조선독립동맹 부주석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부수상 등을 역임하다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된 관료 · 독립운동가.
내용

함경북도 온성 출생으로 이명은 최창석(崔昌錫)·최창순(崔昌淳)·최동우(崔東宇)·이건우(李健宇)이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를 졸업하였다. 일본 유학 중 학우회를 조직해 강경·전주·군산 등지에서 순회강연을 하다가 한때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3년 6월 귀국하여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여하고, 7월 고려공산청년동맹에 참여해 위원이 되었으며, 9월 조선노동대회 발기회를 주도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19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고, 12월 서울청년회 별동조직인 사회주의자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중국 만주에서 김좌진(金佐鎭)의 신민부(新民府) 내에 공산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12월 코민테른 파견 서울파 대표(서울청년회)로 참가했다. 1926년 3월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민족당주비회 결성에 참여했다.

1927년 귀국 후에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간부가 되었고, 1928년 2월 ‘제3차 공산당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1935년 출옥하였다. 1936년 중국으로 망명해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했으며, 1937년 허정숙(許貞淑)과 결혼했다.

1938년 6월 김원봉의 지도노선에 불만을 품은 48명의 사회주의 청년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탈당해 재무한(在武漢)조선청년전시복무단을 결성하고, 7월 조선청년전위동맹으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의 통일전선 단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에 합류했다. 10월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군사기구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지도위원이 되었다. 그해 말 무한(武漢)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연안(延安)으로 이동하여 항일군정대학 교관을 지냈다.

1939년 무정(武亭)과 조중연대를, 1941년 산서성 태항산(太行山)에서 화북(華北) 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했으며, 1942년 김두봉(金枓奉)·무정 등과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확대 개편하여 화북조선독립동맹을 창건하고 중앙상무위원·서기부장이 되었고, 1945년 독립동맹 부주석에 올랐다.

해방 이후 1945년 12월 평양으로 귀국한 뒤 1946년 3월 독립동맹을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하고 부위원장이 되었고, 8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에 선임되었다. 1948년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및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재정상, 1952년 부수상·국가검열상을 지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실각했다.

참고문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1996)
『압록강변의 겨울 -납북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이태호 저, 신경완 증언, 1991)
『한국공산주의운동사』제5권 (김준엽·김창순, 1976)
『조선연감』(조선통신사, 1947)
집필자
서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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