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파 ()

정치·법제
단체
해방이후 소련 점령군과 함께 입북하여 북한군과 정계에서 활동한 소련계 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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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이후 소련 점령군과 함께 입북하여 북한군과 정계에서 활동한 소련계 한인.
개설

해방 후 북한에는 빨치산파 외에도 연안파, 국내파, 소련파 등 다양한 파벌들이 정권획득을 위한 명시적, 묵시적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소련파의 대부분은 소련에 귀화한 사람들로서 소련 점령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왔고, 초창기의 북한 정치에서 소련군을 도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국내에 뿌리가 없어 빨치산파나 국내파와 같이 정치 세력화하기에는 일정한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소련에 근거지를 갖고 있었으므로 언제든지 원하면 소련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고, 실제로 1948년 말 소련군이 철수할 때 많은 소련 계 한인들도 같이 귀국하였다. 소련파는 상당수가 북한정권에 참여하였으나 6.25전쟁과 8월 종파사건을 거치면서 대부분 숙청되었다.

설립목적

소련군 주둔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1945년 8월 26일평양에 진주하였고, 이후 조만식 영도의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가 평남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조만식을 최고지도자로 임명하여 통일전선을 꾸린 후 점차적으로 그의 세력들을 숙청한다는 구상을 계획했다. 소련파들은 소련군이 점령한 38도선38도선 이북지역에 새로운 당 중앙 지도기관과 정규군을 구성하여 한반도 공산주의 운동에 근거지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급부상 하였다. 이들은 북한을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연원 및 변천

1945년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부는 평양에서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를 개최했다. 또한 1945년 10월 28일 소련군은 분권적인 각 지방의 행정조직을 통합하기 위하여 ‘북조선 5도행정국’을 정식으로 발족하였고 책임자로는 조만식을 임명하였으나, 부국장에는 소련계 2세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각 국장에는 소련파를 포함하여 빨치산파, 연안파 등 모두 안배하여 각 정파의 연립적인 성격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각 국의 국장은 소련 점령군이 임명했고 각 국마다 소련인 고문이 배치되어 업무를 지휘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모든 업무가 소련군의 계획하에 결정되는 양상이었다.

1946년 초 철도보안대를 창설할 때 소련파들이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북조선 임시위원회 위원장인 김일성은 철도경비를 위해서 추가적인 병력이 필요함을 소련 군정 당국과 협의하여 각 도에 단위별로 철도보안대를 창설해 나갔다. 이때 소련파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창설 작업이 급진전되었다.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 창설시 학교 편성 때에도 소련파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학교장 아래 군사 및 정치 부교장 그리고 전술, 포병, 사격, 통신의 4개 학부가 설치되었고, 4개 학부의 학부장에서 모두 소련파 출신들로 채워졌다. 그리하여 소련파들의 이러한 활동이 기반이 되어 제2차 당 대회에서는 북한정부를 수립할 때 소련파들은 빨치산파, 연안파, 국내파 등과 함께 연합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

기능과 역할

6.25전쟁 기간 소련파와 김일성간의 갈등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소련계 한인들 중에서 김일성에게 정면으로 도전한 사람은 소련파의 최고 실력자 허가이였다. 허가이는 국내파의 도전에 앞서 1951년부터 노동당의 당 조직 문제와 당원 축출 문제를 놓고 김일성과 대립하였다. 전쟁 기간 김일성이 전쟁을 정적제거를 위한 호기로 활용함에 따라 많은 소련파 인사들이 패전책임으로 인해 숙청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허가이였다.

허가이와 김일성간의 갈등은 1950년 말 조선 노동당 중앙 위원회 제3차 전원 회의에서 비롯되었는데,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매우 강경한 어조로 연설했다. 그는 전쟁을 통하여 충성스런 당원과 그렇지 못한 당원이 드러났다고 주장하였고, 당내 위치에 관계없이 충성스럽지 못한 당원들을 엄단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김일성은 이 사업이 적절한 법절차에 따라 진행되어야 하고 무차별적인 처벌을 자제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 사업은 허가이가 주도하는 검열 위원회의 임무였는데, 1950년 12월부터 중앙 위원회 제4차 전원 회의가 열린 1951년 11월 1일까지 거의 1년 동안 허가이는 김일성의 지시를 어기고 하위 당원에 대한 무차별 출당 처분을 단행해 버렸다. 김일성은 축출당한 사람들을 복당시키도록 명령하였으며, 이때 축출당한 당원들은 1952년 12월 15일의 중앙 위원회 제5차 전원 회의 때까지 전체 당원의 69.2%가 복권되었으며, 더 많은 당원들이 모집되었다.

현황

1951년 11월 출당처분 사건을 계기로 소련파의 거두 허가이는 숙청되었고, 1953년 8월 4일에 열린 중앙 위원회 제6차 전원 회의에서 그의 자살이 발표되었다. 김일성은 자신을 권좌에 앉혀 준 소련군이 북한에서 계속 지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면 감히 언급조차 할 수 없는 말들로 허가이를 고발했다. 김일성은 허가이가 마치 소련에서 나온 모든 사람들의 대변인이나 되는 듯이 행동하면서 개인적 영웅주의에 빠지는 과오를 저질렀다고 지적 했다. 박창옥을 비롯해서 상당수의 소련파가 여전히 고위직에 선출되어 있었으나, 자신의 빨치산들을 제외하고는 해외에서 혁명 활동을 한 사람들을 모두 매도하기 시작했다.

이후 1956년 8월 회의에서 소련파 박창옥이 연안파인 최창익 등과 함께 연립지도체제의 수립을 명분화하여 공개적으로 반김일성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러한 움직임은 김일성을 비롯한 빨치산파의 즉각적인 반발을 피할 수가 없었다. 김일성과 빨치산파들은 즉각 대대적인 역공을 퍼부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지금까지 정계에 남아있던 소련파 인사들과 연안파들이 모두 숙청되었다.

의의와 평가

소련파와 연안파가 숙청된 ‘8월 종파사건’은 김일성의 권력을 공고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61년 9월 11일부터 18일까지 개최된 제4차 당 대회는 과거의 종파주의를 청산하고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 동료들만이 지휘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건설로 향하는 발판이 됐다. 제4차 당 대회는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파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었고, 파벌투쟁은 빨치산파의 일방적 승리로 귀결됐음을 내외에 과시한 것이었다. 4차 당대회 이후 권력문제와 관련해서 김일성 앞에는 더 이상의 정적은 없게 됐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김일성은 가계우상화와 본인의 절대화에 매진했다.

참고문헌

『한국전쟁과 노동당전략』(김점곤, 박영사, 1983)
『남노당 연구』(김남식, 돌베게, 1984)
『북한인민군대사』(장준익, 서문당, 1991)
『조선노동당연구』(이종석, 역사비평사, 1995)
『북한의 당, 국가기구, 군대』(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 한울, 2007)
집필자
양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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