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정치학원은 학생들이 모두 남한에서 월북한 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창설 당시에는 대남공작요원 양성이 목적이었으나 남한에 제주4·3항쟁과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유격대요원 양성도 겸하게 되었다. 교육과정은 유격대요원을 양성하는 3개월의 군사 단기반과 정치공작요원을 양성하는 6개월의 정치반이 있었고, 북한은 무려 10차에 걸쳐 총원 2,385명을 양성하여 남파하였다.
북한에서는 표문이, 육남오, 강철 등 남로당원이 주축이 되어 1947년 말경 남한에서 전개되고 있는 남로동 계열의 활동을 지원할 정치공작대원들을 양성하기 위해 1948년 1월 1일 강동군 승호면 입성리에 ‘강동정치학원’을 설립하였다.
초대 학원장에는 소련에서 입북한 박병률이 임명되었다. 군사 부원장에는 김일성과 함께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서철이 임명되어 주로 유격대 훈련을 담당했고, 정치 부원장에는 남로당 출신의 박치우를 임명하여 정치공작을 담당하였다. 경리부원장에는 이칠성(본명:이풍이, 김책의 처남)을 임명하여 후방지원(군수지원)을 담당했다. 교관단에는 서태환(대구 출신), 이종률(서울 출신), 강석기(북한 출신), 신철(소련 출신) 등이 일반학을 담당했고, 병원은 100개의 병상을 준비하여 학생 및 공작요원의 치료를 담당했다.
본 학원에 입교하는 학생은 모두 남한에서 월북한 자들로 창설 당시에는 대남공작요원 양성이 목적이었으나 남한에 제주4·3항쟁과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유격대요원 양성도 겸하게 되었다. 교육과정은 유격대요원을 양성하는 3개월의 군사 단기반과 정치공작요원을 양성하는 6개월의 정치반이 있었다.
교육과목은 소련공산당사를 비롯하여 신민주주의, 정치학, 철학, 경제학, 남로당사 등의 일반학과 사격, 폭파, 지형학, 공병학, 제식훈련과 유격전술 그리고 남한 적화공작에 관한 교육이었으며 1950년 6월 25일 본 학원이 폐쇄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대남사업 담당책임자인 이승엽이 본 학원에 기거하면서 졸업생들에 대한 남한 침투를 직접 지령하고 있었다. 이들은 ‘인민유격대’라는 명칭으로 훈련했고, 대남연락소를 통하여 남한으로 침투하였다. 이들은 1948년 11월부터 1950년 3월까지 총 10회에 걸쳐 주로 중동부 산악지역과 동해안으로 침투하였으며 남한 내의 현지 공비와 합류한 후 지하당을 조직하여 약탈, 살인등 각종 만행을 자행하였으나, 국군의 소탕작전에 의하여 거의 괴멸되어 가는 상태에서 6·25가 발생하게 되었다.
인민유격대는 전쟁이전까지 약 2,400명의 강동정치학원을 수료한 인민유격대가 침투하기는 하였으나, 대부분 한국 군경에 의하여 사살되거나 분산되었다. 일부 현지 공비들과 제휴한 후에도 기대했었던 대규모의 폭동 유발이나 해방구를 설치하는데는 실패하였고, 산 속으로 은거, 수세에 쫓기다가 남침시 불과 460명 정도(현지 공비 포함)가 생존하였을 뿐, 특수부대 또는 공정부대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데는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북한 지도부는 강동정치학원 출신의 인민유격대가 남한침투에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다고 평가해서 1950년 6월 25일 남침과 동시에 강동정치학원을 폐쇄하였다. 한편 본 학원이 폐쇄되기 전인 1949년 4월 정규전과 비정규전의 배합을 위하여 함북 회령에 유격요원 비정규전 양성기관으로 제3군관학교(제766부대의 통상 명칭)를 신설하고, 교장에 오진우를 임명하여 정규전에 대비한 비정규전부대 양성을 시작하고 있었다.
한국군은 인민유격대를 소탕하기 위해서 당시 국군 8개 사단 중 3개 사단(제2사단 대전, 제3사단 대구, 제5사단 광주)을 후방 지역에 분산 배치하여 공비소탕작전을 전개해야했다. 그러므로 국군은 계획된 대대는 훈련을 하지 못한 채 공비토벌 작전을 전개해야 했다. 특히 6·25전쟁 발발 시 초기에 이들 3개 사단을 전방으로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에 초전 방어 작전에 진 원인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북한이 인민유격대를 남한에 투입시켜 후방을 교란하고 한국군전력을 약화 시킨다는 목표도 어느 정도 달성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