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은 인간과 인간 집단을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넓게는 체질 인류학, 언어 인류학, 고고학, 사회 문화 인류학, 좁게는 사회·문화 인류학을 지칭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대학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인류학은 초기의 진화주의, 전파주의를 거쳐 현지 조사와 민족지(民族誌)라는 방법론적 혁신을 통해 ‘과학’을 강조하며 근대적인 분과 학문으로 확립되었고 (구조)기능주의가 확산되었다. 이후 인류학 내부와 외부에서의 비판은 물론, 탈식민, 세계화, 정보화 등의 환경 변화에 대응하며 자체 혁신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인류학(anthropology)이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어의 ‘anthropos(인간)’와 ‘logia(학문, 지식)’를 합친 것으로서 16세기에 처음 등장했지만, 일각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으며 철학에서는 ‘인간학’이라 번역하고 있다. 한편 고대 그리스어의 ethnos(민족, 인종, 인간 집단 등)에서 기원한 민족학(ethnology)은 18세기에 처음 등장하였는데 19세기 말부터 점차 사회 인류학 또는 문화 인류학이라는 용어로 대치되었다. 다만 ethnos에 대한 기록(誌, graphia)을 의미하는 민족지(民族誌, ethnography)는 현지 조사(fieldwork) 방법과 함께 인류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 간주되고 있다.
인류학은 흔히 해골이나 야만인들의 이상야릇한 풍습을 조사하는 호사가들의 일이라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근대 학문 가운데 인간이 그 자신을 이해하려는 가장 진지하고 성찰적인 노력의 하나이며 현재와 미래의 삶과 매우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이는 과학의 대중화 공모전에서 1949년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책이 『인간을 위한 거울: 현대인의 삶과 인류학의 관계(Mirror for Man: The Relation of Anthropology to Modern Life)』였고, 한국문화인류학회에서 창립 50주년을 맞아 일반 시민들을 위해 펴낸 책이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라는 사실은 물론 UNESCO(국제 연합 과학 문화 기구)가 인류학적인 문화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인류학은 하나의 분과 학문에 불과한 것 같지만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시각과 방법에 매우 놀랍고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 오면서 여러 다른 학문과 사상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영향을 주어 왔다.
근대 학문으로 인류학이 형성되고 대학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부터이니, 인류학은 상대적으로 젊은 학문이다. 그러나 자의식을 지닌 인간이라는 존재는 아득한 옛날부터 스스로에 대해 또한 다른 인간 집단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기술, 비교, 해석, 성찰을 해 왔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나 헤로도토스, 이븐할둔, 또는 고대 한국과 중국의 사서(史書)나 사신(使臣)들의 보고서와 여행기 등에서 인류학의 연원을 찾기도 한다.
인류학은 흔히 다른 학문들과 달리 인간을 총체적(holistic)으로 연구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인류학의 총체성은 정치, 경제, 사회 관계, 심리, 종교, 의례, 상징, 생태계, 심지어는 신체 등 각 분야 간 긴밀한 상호 관련성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동시에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의례적이라는 시각(총체적 사회적 사실, total social fact)에서 찾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물론 이는 상식이라 할 수도 있으며 또한 한 사람의 연구자가 어떤 사회나 현상의 모든 측면을 빠짐 없이 연구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서태평양 지역의 쿨라(kula) 교환처럼 선물이라 주장되는 행위가 동시에 의례적이며 사회 관계적이고 정치적이며 경제적이라는 사실, 더구나 경제가 ‘합리성’을 추구하는 독자적인 원리나 영역이 아니라 사회적 제도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embedded)’는 인류학의 발견과 시각은 이후 경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커다란 관점의 전환을 가져오면서 인류학의 총체적 관점은 거의 모든 사회 과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현대 인류학의 핵심인 문화(culture) 개념은 근대 유럽에서 문명(civilization) 개념보다 오히려 조금 늦게 등장하여 초기에는 문명과 혼용되었으나, 당시에는 상대적으로 후진적이던 독일에서 점차 선진국 영국과 프랑스의 문명 개념에 대항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문명은 도시적이고 세련된 것을 의미했으나 지식인 및 신흥 부르주아의 ‘진보’와 결합되면서 바람직한 정치적 · 경제적 · 제도적 측면을 지칭하기에 이르렀고, 독일에서는 문화(Kultur)가 보다 정신적이며 내면적인 성취와, 교양(Bildung)을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물질적 · 제도적으로, 즉 문명에서는 후진적인 독일이 정신적으로, 즉 문화적으로는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못하지 않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여기에 루소 같은 사회 계약론자가 국가와 문명을 비판하고 불평등과 사유 재산이 없는 자연 상태를 가정하면서, 야만인이란 어리석고 비루하고 잔인한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이라는 이미지가 강력한 호소력을 갖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발전시킨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는 문화 개념은 아프리카나 남태평양의 주민들에게 확대될 수 있었고, 인간 집단의 문화를 그 내부자의 시각으로 이해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문화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가 등장하면서 보편적 계몽과 성취라는 의미에서 대문자와 단수로 표기되던 문화(Culture)가 모든 민족이나 인간 집단이 각각 문화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소문자와 복수를 사용하는 문화[culture(s)]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편 문화 상대주의는 인간 집단의 생물학적 우열을 주장하는 인종주의적 편견에 맞서는 강력한 도구로도 발전했는데, 문화 상대주의는 종종 도덕적 · 윤리적 상대주의와 혼동되면서 오해와 비난을 받기도 한다. 따라서 인류학의 문화 상대주의는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론적 관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류학은 역사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으며 발전해 왔다. 인류학은 문명의 발전과 인류의 진보에 대한 계몽 시대의 인식을 공유한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이들은 유럽이 팽창하고 교통과 통신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증가한, 세계 각지의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고 설명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소위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유럽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수많은 새로운 동식물, 낯선 민족, 문화들에 대한 정보로 박물학(博物學) 또는 자연사(Natural History)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인류의 진보를 확신하던 동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초창기 인류학자들은 전세계의 수많은 민족과 문화를 몇 개의 기준에 따라 그 발전 상태를 분류하여 인류 문명의 발전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초창기에는 과장, 오해, 상상력의 결합으로 문제가 많았지만, 계몽 시대 이래 사회 제도, 기술, 물질문화가 진보한다는 생각이 팽배한 가운데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되면서 학자와 지식인들도 새로 “발견”된 단순한 물질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아득한 옛날 우리 조상의 모습이라 간주했고 동시대에 살고 있던 이들을 ‘원시인(原始人)’이라 불렀다. 영국의 타일러(Tylor, E. B.)와 미국의 모건(Morgan, L. H.)을 비롯한 인류학의 개척자들은 전 세계의 모든 인간 · 사회 · 문화가 ‘야만’에서 ‘미개’를 거쳐 ‘문명’ 상태로 진화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들을 하나의 발전 축 위에 배열하려고 시도했다.
한편 세계 각지에서 비슷한 문화 요소들이 발견되는 것은 전파의 결과라고 주장하며 그 과정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나타났다. 영국의 스미스(Smith, G. E.)와 페리(Perry, W. J.) 등은 모든 문명이 이집트에서 시작되어 전파되었다고 주장했으며, 독일어권의 랏첼(Ratzel, F.), 그래브너(Graebner, F.), 슈미트(Schmidt, W.) 등은 세계를 여러 개의 문화권으로 분류하고 각 문화권 안에서 문화 요소의 전파 과정을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인류 문명사의 복원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우 매력적인 지적 작업이었으나, 정보의 부족과 부정확성이라는 문제가 있었으며 문화적 특질과 요소가 그 사회 문화적 맥락과 유리된 상태로 검토되었다. 게다가 이는 상상력과 추론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초기의 진화주의와 전파주의 인류학을, 억측의 역사라 비판하면서 인류학을 보다 엄밀한 학문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등장했다. 그 하나는 미국의 위슬러(Wissler, C.)와 보아스(Boas, F.) 등으로 이들은 ‘문화 영역(culture area)’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구체적 수준의 전파와 발전, 즉 집단들의 구체적인 역사적 접촉과 수용을 추적하려 하였으며 성급한 일반화나 이론화를 거부했다.
인류학을 “과학적인” 학문으로 확립한 것은 말리노프스키(Malinowski, B. K.)가 1920년대에 이룩한, 장기적이고 치밀한 "현지 조사"라는 방법론적 혁신이다. 당시는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던 자연 과학처럼 인간 집단에 대한 연구도 엄밀한 방법론을 통해 보편적 법칙을 발견할 것을 염원하던 상황이었다.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수행할 수는 없지만, 상대적으로 고립되고 단순한 물질 문화를 가진 소규모 사회에서 장기간에 걸쳐 치밀한 참여 관찰(participation)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는 인류학적 현지 조사는 일종의 ‘자연 실험(natural experiment)’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이렇게 수집한 민족지 자료(ethnographic data)가 충분히 축적되면 비교 분석(comparative method)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하고 보편적 법칙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인류학자가 미개 사회로 조사를 떠나는 것은 마치 자연 과학자가 실험을 하는 것처럼 인간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지 미개사회 자체의 이해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닌 것이다. 비록 현지 조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뒤르켐(Durkheim, E.)은 종교 생활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미개 사회를 연구 주제로 선택했다. 가장 단순하다고 알려진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종교, 즉 토테미즘(totemism)을 민족지 자료를 통해 연구했다. 또한 마르셀 모스(Mauss, M.) 역시 방대한 민족지 자료를 분석하여 증여(gift)의 본질이 호혜성이라는 것을 밝혀 냈다. 로이드 워너(Warner, L.)는 미국의 공장 연구(호손 실험)나 현대 도시 연구(양키 시티 조사)의 준비 작업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을 연구했다.
그리하여 인류학자의 연구는 문화 특질, 요소의 기원, 전파 과정을 밝히는 것보다 사회 또는 문화 속에서 한 부분이 다른 부분들과 어떠한 관계가 있고 전체의 작동에 어떠한 기능(function)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밝힘으로써 전체를 이해하 데 중요성을 두는데, 이를 기능주의라 한다. 여기에 래드클리프브라운(Radcliffe-Brown, A. R.)은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에 주목하면서 인간 집단의 짜임새인 사회 구조를 통해 사회의 작동을 설명하려는 구조 기능주의를 발전시켰다.
한편 미개인의 정서나 인지 능력이 현대인과 다르다거나 민족마다 인성이나 심리가 다를 수 있다는 논의가 발전했는데, 특히 미국에서는 각기 상이한 기질과 잠재력을 갖고 태어나는 개인들이 자신의 문화 속에서 성장하면서 독특한 인성을 형성하는 과정에 주목하는 ‘문화와 인성(culture and personality)’ 연구가 루스 베네딕트(Benedict, R. F.)와 마거릿 미드(Mead, M.)의 연구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제이 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적성국에 대한 심리전에 참여하면서 ‘국민성 연구’가 등장했는데 그 부산물의 하나가 일본인의 인성을 살펴본 『국화와 칼』이다. 문화와 인성 연구는 이후 문화 접변(acculturation) 연구와 심리 인류학, 인지 인류학 등으로 발전했다.
제이 차 세계 대전 직후에 창설된 국제 연합 교육 과학 문화 기구(UNESCO)는 여러 국민 또는 민족 간의 무지, 편견, 오해가 전쟁의 원인이라며 교육과, 문화 간 이해를 증진하고 인류의 지적 · 도덕적 연대 위에 평화를 세우기로 했다. 제이 차 세계 대전을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전쟁 노력에도 깊이 관여했던 마거릿 미드는 루스 베네딕트와 함께 전후의, 새로운 국제 질서가 문명론적, 인종주의적 위계가 아니라 평화와 ‘차이 속의 조화’를 기조로 수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인 유네스코(one-person UNESCO)’라고도 일컬어졌던 마거릿 미드는 브라질의 인류학자 라모스(Ramos, A.)가 이끌던 유네스코 사회 과학국의 스위스 인류학자 알프레드 메트로(Métraux, A.)와 함께 인류학적 통찰과 지식을 유네스코를 위해 활용하려 노력했다. 특히 유네스코는 당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던, 인종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없애고자 매우 힘겨운 싸움을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 C.)도 『인종과 역사』(1952)를 집필하였고 이외에도 여러 사회 과학자가 동참했다. 유네스코가 발행한 이러한 책자들은 미국의 민권 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제시 잭슨(Jesse Jackson) 목사 같은 이들은 유네스코 책자를 들고 남부의 주들을 누볐다.
이러한 유네스코의 이상과 문화 인류학적 접근은 냉전과, 한국전쟁의 발발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진영 대립이 격화되면서 입지가 매우 어려워졌다. 그리고 근대화 담론과 국제 개발 협력 이념이 유엔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고유한 문화는 합리성과 발전에 장애가 되는 것처럼 폄하되었다. 그러나 제3세계 국가들의 종속과 불균형이 점점 심화되자 유네스코는 참여적(participatory) 발전, 내생적(endogeneous) 발전 등을 강조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1982년 멕시코에서 문화와 발전을 주제로 세계 문화 정책 회의를 개최하고 문화를 ‘예술과 문학에 한정되지 않고 인간의 생활 양식과 기본적인 권리들을 포함하여, 한 사회나 사회 집단을 설명해 주는 독특한 정신적 · 물질적 · 지적 · 정서적 특질들의 복합적 전체’라고 정의하면서 전 세계의 문화 정책이 이러한 개념에 입각해 추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인류 무형 문화 유산 제도의 출범과 문화 다양성 캠페인 및 문화 다양성 협약 등은 유네스코가 문화 인류학적인 문화 개념을 전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이 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식민지들의 독립, 그리고 지역 연구의 확대 과정에서 인류학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연구비가 확대되면서 인류학자들에게 현지 조사를 수행할 수 있는 기회가 더욱 확대되었지만 인류학자들은 급격히 변화하는 조사 환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 들어와 인류학자들은 (구조)기능주의, 문화와 인성 접근법의 문제와 한계를 지적했으며, 친족 체계를 피로 이어지는 출자(出子)가 아니라 혼인, 즉 결연(結緣)의 관점에서 해석한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의 다양한 내용에 대한 저변의 이항 대립 분석을 통해 보편적 심성 구조를 설명하는 구조주의 이론을 제시하여 인류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갈등과 개인의 역할에 주목하고 구조보다 과정(process)을 중시하거나(Gluckman, M., Turner, V.), 여성의 시각, 현지 조사자의 역할, 주민의 상호작용에 주목하는 비판적이며 성찰적 연구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상징과 인지적 과정에 대한 관심, 기술과 환경, 생태적 요인을 중시하는 시각(Steward, J.),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의 본격적 적용, 신진화주의(White, L.) 등 매우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자연 과학을 모델로 했던 구조 기능주의를 비판하며 ‘의미’와 ‘해석’을 강조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또한 경제 인류학, 심리 인류학, 인지 인류학, 도시 인류학, 행동(action) 인류학, 의료 인류학, 생태 인류학, 응용 인류학, 정치 인류학, 법 인류학, 건축 인류학, 기업 인류학 등 다양한 하위 분과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세계화의 진전은 인류학에 더욱 큰 자극과 변화를 가져왔다. 세계가 모두 서구식 근대화를 거치면서 동질화될 것이라는 일부의 예측이나 주장과는 달리 문화적 차이와 다양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에 이어 동아시아 국가들이 경제 성장에 성공하면서 서구의 근대화와 다른 경로가 가족과 유교 문화의 역할을 통해 진행되었다는 새로운 해석도 제기되었다. 서구가 만들어 낸 근대성과 다른 여러 모습의 근대성을 파악하려는 연구도 많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화로 증가하기 시작한 해외 직접 투자와 마케팅으로 문화 간 이해는 더욱 절실해졌다. 따라서 인류학자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으나 인류학은 그러한 수요에 부응하기에는 너무 규모가 작았고 한편에서는 학문의 순수성을 고집하기도 했다. 인류학의 관심사와 대상이 너무나 확대되고 다양화한 결과 학문으로서의 정체성마저 사라지거나 파편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타나는 등 위기 의식도 고조되었다.
그런데 ‘위기’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98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식민주의의 시각에서 제기된 인류학에 대한 비판이다. 인류학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서 기원했다는 문제 제기는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런던 유학 시절 사회 인류학을 전공했던, 가나의 은크루마(Nkrumah) 대통령은 아프리카 식민 통치에 영국 인류학자들이 협조했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현지 조사 방법의 전형(典型)을 만들어 낸 말리노프스키의 일기장이 출간되면서 그 역시 인종주의자였다는 폭로도 있었다. 또한 진화주의와 전파주의가 백인 우월주의적이라는 비판과 함께, 구조 기능주의가 ‘과학’을 표방하고 있지만 식민지 현실에 눈을 감고 있었으며 변화를 설명하지 못하고 체제 긍정적이라는 비판도 이미 인류학 내부에서 제기되고 있었다. 오리엔탈리즘 또한 자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sm)와 인종주의를 비판해 왔던 인류학자들에게는 아주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류학자들은 그나마 인류학은 다른 학문에 비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비판적이고 비협조적이었다고 자부하고 있었고 많은 인류학자들이 원주민들의 처지에 동정하면서 때로는 이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믿고 있었다. 말리노프스키의 인종주의적 코멘트(comment)는 뻔뻔한 위선이라기보다는 시대적 산물인 인간의 한계라고 치부할 수 있었다. 실제로 많은 인류학자들은 인종 차별과 서구의 자문화 중심주의를 비판했으며 심지어 미국 인류학회 이사회는 세계 인권 선언의 초안에 대해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이라며 반대하기도 했다. 일부 인류학자들이 인류학적 지식의 활용으로 불필요한 갈등을 방지하고 고통을 줄이는 등 식민 통치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식민지 관리의 훈련에 참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제국주의 국가의 정치적 구조와 학문 권력의 위계 내에서 인류학과 인류학자들은 주변적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단한 기여를 할 기회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인류학이 자랑하고 있던 현지 조사와 민족지 방법론에 대한 비판 역시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현지 조사와 민족지는 당시의 기성세대 인류학자들 사이에서도 오래 전부터 문제시되면서 개선책이 모색되고 있었다. 물론 현지 조사가 권력 관계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식민 종주국가의 국민이라는 특권적 지위를 가진 백인 남성이 피식민지의 미개인들을 대상화한 작업이었으며 ‘글쓰기’와 ‘목소리’를 독점했다는 비판은 뼈아픈 것이었다. 특히 참여 관찰은 자연 과학 모델을 추구하지 않는 인류학자들에게조차도 진지하고 엄밀한 학문으로서 인류학의 정당성과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러한 비판으로 인류학의 토대가 무너지지나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지 조사에 관한 논란 역시 이미 인류학자들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멕시코의 테포스틀란(Tepoztlán)을 현지 조사했던 오스카 루이스(Lewis, O.)는 1951년에, 오래 전인 1920년대에 이곳을 조사했던 로버트 레드필드(Redfield, R.)가 주민들의 가난, 질시, 좌절 등 비참한 현실보다는 조화로운 공동체적 삶을 그렸다고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하고 레드필드가 이에 대해 반론을 하면서 현지 조사의 객관성과 신뢰성을 둘러싼 논의는 이미 1950-60년대에 인류학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한편 1980년대에는 데릭 프리맨(Freeman, D.)이 『사모아의 미드: 인류학적 신화 만들기와 부수기』(1983)의 저술로 마거릿 미드가 사모아에서 수행했던 현지 조사의 신뢰성을 끈질기게 공격했다. 미드의 『사모아의 사춘기』(1928)는 출판 이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미국의 교육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프리맨은 미드가 스승인 보아스의 주장을 증명하려던, 젊고 어리석은 여자 대학원생에 불과했고 사모아 사람들에게 ‘운명적으로’ 속았다고 주장했다. 프리맨은 사춘기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며 서구 문화의 성에 대한 엄격한 태도와 관련이 있다는 미드의 주장이 현지의 두 소녀가 한 농담에 기반을 둔 엉터리 현지 조사의 결과라고 “폭로”했다. 문화 상대주의와 소위 ‘문화 결정론’이 오류이며 생물학적인 요인이 문화나 교육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미국의 보수 우파와 사회 생물학자들은 이에 환호했다. 마거릿 미드가 자유와 관용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 온 리버럴한 입장을 대표하는 여성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모아에서 현지 조사를 했거나 프리맨이 증거로 내세웠던 증거들과 마가렛 미드의 현지 조사 노트를 자세히 검토한 전문가들은 미드가 약간의 오류는 범했지만 현지어(現地語)를 상당한 수준으로 구사했던, 뛰어난 연구자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프리맨은 많은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한 것에 불과했다. 그것도 미드가 사망하여 반론을 제기할 수 없게 된 후에 비판을 시작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의미 있는 논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아마도 기성세대 인류학자들에게 가장 충격을 주었던 것은 인류학적 지식의 생산, 소통, 소비 역시 권력 관계의 일부라는 비판이었다. 사실 인류학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구의 다른 학문들이나 제도들이 인종주의, 식민 지배, 남성 우월주의, 서구 중심주의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고 있다고 비판해 왔으며 오로지 인류학만이 그러한 편견과 차별에서 자유롭다고 자부해 왔다. 특히 1920년대에 인류학에 선풍을 일으켰던 ‘과학주의’를 비판하며 ‘인류학은 역사학’이라거나(Evans-Pritchard, E. E.) ‘과학적 설명’보다 ‘의미의 해석’을 강조해 온 인류학자들(Geertz, C. 등)은 어떤 의미에서 소위 과학적 지식조차도 사회 문화적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객관적 방법이라는 믿음이야말로 착각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을 어느 정도는 이미 상식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광기(狂氣)의 발명에 관한 미셸 푸코(Foucault, M.)의 견해를 확장한다면 인류학이라는 학문조차도 ‘미개인’ 또는 ‘문화적 타자’를 발명하고 이들을 대상화하여 규정하고 차별하며 배제하고 지배하는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 된다. 이러한 비판의 칼날은 사회 문화적 구성주의(constructionism)를 상식으로 여기던 인류학자들조차도 그저 편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일부 인류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이 지나치게 과장되고 때로는 부정확하다고 지적했다. 실효성 있는 대안이나 개선책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을 파괴하고 해체하려 든다면서 못마땅해하기도 했다. 해체와 파괴에 탐닉하다가 학문의 기초와 정체성마저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는 위기의식과 우려도 표시했다. 또 일부는 새로운 민족지 실험이 지나치게 파편화되고 자기 중심적이라는 점을 경계하면서 엄청난 시간과 비용과 노력이 소요되는 인류학 현지 조사가 과거와 같이 충실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한 민족지를 생산하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아무튼 인류학자와 정보 제공자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새로운 실험적 민족지들이 출간되었고 이에 대한 평가는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그러한 가운데 아마존 유역의 야노마뫼족을 가장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사람들로 널리 세상에 알렸던 나폴레옹 샤뇽(Chagnon, N.)의 저술과 현지 조사를 둘러싼 논란이 발생했다. 샤뇽의 저술들은 내용이 매우 극적인 탓에 매우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미국의 저술가 패트릭 티어니(Tierney, P.)가 2000년에 샤뇽과 그의 동료들이 원주민들에게 해로운 방식으로 이들을 묘사했고 적절한 동의를 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홍역 같은 질병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책을 출판했다. 이 사건은 프리먼-미드 사건과는 정반대로, 야노마뫼인들의 공격성이 마을의 확대와 자손의 재생산에 도움이 된다는 사회 생물학적 주장을 했던 인류학자의 현지 조사에 대한 신뢰성과 도덕성을, 진보 성향의 문필가가 공격한 사건이었다. 미국 인류학회가 즉시 조사에 나서 처음에는 홍역에 관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티어니의 주장이 상당히 타당하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2002년에 제출되었으나 보다 신중하고 자세히 조사한 결과 티어니의 주장이 허위라는 것이 밝혀졌고 미국 인류학회는 2005년에 그 보고서를 무효화시켰다. 이때는 이미 앨런 소칼(Sokal, A.)이 터무니없는 내용의 글을 포스트모더니즘의 현학적 용어들을 구사하면서 논문처럼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끌던 문화 연구(Cultural Studies)의 유명 학술지 Social Text에 게재했던 소위 ‘소칼 사건’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력이 급격히 감퇴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격렬한 비판의 1980년대와 1990년대가 지나고 21세기에 들어선 지 20년이 넘어선 현재, 인류학은 일부 인류학자들이 우려했듯이 학문의 근간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대량의 이탈자가 나오지도 않았다. 현지 조사와 민족지의 신뢰성과 도덕성에 가해졌던 공격은 매우 충격적이었지만, 진지한 검토와 재조사를 거치면서 신뢰성과 도덕성의 문제였다기보다는 서로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과 해석의 문제였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이루어진 성찰과 토론은 이후 인류학자들을 더욱 더 성숙하고 신중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인류학자들은 대부분 비판을 수용하고 소화하면서 보다 성찰적이고 보다 섬세한 현지 조사와 민족지 글쓰기 작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도덕적으로 더욱 각성되고 인류의 미래와 공동체의 지속 가능 발전을 생각하는 공공 인류학(public anthropology)이 커다란 힘을 얻고 있다.
유네스코 같은 국제 기구도 인류학적 문화 개념과 방법을 수용하여 지속 가능 발전이라는 목표의 달성이나 교육의 미래를 그리는 것은 물론 기후 변화와 AI 등 첨단 기술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COVID 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유네스코가 디지털 인류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미개인이 사라지고 농촌과 산촌의 인구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으며,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원주민들의 삶이 도시화와 정보 통신 기술로 변하고 있으나 인류학의 연구 대상과 주제는 더욱 확대되고 다양화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 훨씬 전부터 위기에 처해 있던, 인류학의 학문적 정체성 역시 특별히 더 훼손된 것 같지도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을 겪으면서 인류학자들이 권력과 불평등 그리고 이에 대한 침묵이나 정당화에 더욱 민감해지고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그 비판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비판은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이었고 인류학의 성숙과 발전에 기여했다. 한편 인류학계 내부에서도 백인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는 학문 권력과 자원에 대한 여성주의적인 비판과 함께 차별과 배제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나쁜 관행들이 단순히 개인적 한계나 예외적 일탈이라기보다 훨씬 더 뿌리 깊고 구조적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제 인류학에서는 백인 남성의 독점적 권위가 상당히 무너졌으며, 전통적으로 주변인이었던 인류학자들이 여성, 유색인 여성, 유색인 남성, 게이와 레즈비언, 현장 활동가의 정체성으로 다양한 목소리를 내며 경합하고 소통하는 학문의 장이 되었다. 다만 영미와 선진국 중심이라는 뿌리 깊은 구조적 문제는 지속되고 있으나, 현지 조사와 민족지 방법, 총체적 관점이라는 인류학의 방법론은 변화하는 맥락에서 새로운 혁신을 통해 인류학적 관점과 해석의 힘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탈식민화, 세계화, 정보화로 중대한 도전을 받으면서 복수 현장 민족지(multi-sited ethnography)를 비롯하여 다양한 혁신을 시도해 온 인류학의 방법론과 글쓰기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거치면서 더욱 새로운 혁신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팬데믹으로 인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현지’에 들어가서 장기간 현지인과 어울려 살면서 참여 관찰 같은, 대면적인 심층 조사가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으나, 상당수 인류학자들은 ‘현지인’들과 전화, 소셜미디어, 인터넷 등으로 커뮤니케이션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인류학적 현지 조사의 ‘현실’과 ‘현장’을 어떻게 다시 규정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인류학적 연구 방법을 보다 더 확장해야 한다는 새로운 제안과 성찰도 풍부하게 나오고 있으며 인간과 비인간(非人間)의 관계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철학적 논의와 현장 연구가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한국에서 이루어진 한국인 인류학자들의 활동을 다룬다. 한국을 연구하는 외국인 인류학자들의 활동과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학자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항목에서 다루는 것이 적절할 것이기에 다루지 않았다.
한국에 근대 인류학적 지식과 문제의식이 들어온 것은 구한말이다. 진화론이 중국과 일본을 통해 한국에도 소개되었고 진화주의와 전파주의 인류학이 단편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한국 문화의 기원이나 특징에 관한 최남선, 이능화 등의 작업은 물론 조지훈의 「한국문화사 서설」에서도 그 영향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분과 학문으로서 인류학의 제도적 발전에는 식민 지배와 한국전쟁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침략과 전쟁으로 학문의 씨앗이 싹을 피우려다 무참히 짓밟혔고 다른 인간 집단과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보다 한동안 한국 문화와 한국인의 기원과 특징 문제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전쟁 이후 사회 과학 전반이 미국의 영향 아래에서 발전한 것처럼 인류학 역시 미국 인류학의 압도적 영향 속에서 발전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민속 연구는 한국의 인류학 역사에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아키바 다카시[秋葉隆],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등 일본의 사회학자와 민속학자, 그리고 손진태, 송석하 등이 한국의 민속을 조사했다. 송석하, 손진태, 정인섭은 아키바 다카시, 이마무라 도모[今村鞆]와 함께 1932년 조선민속학회를 설립했다. 이들은 모두 헤르더(Herder, J. G.)와 그림(Grimm) 형제 이래 독일의 통일을 염원하며 발전한 민족주의적 독일 민속학(Volkskunde)의 영향을 받았다. 주로 구비 전승의 연구에 집중했던 영국의 포클로어(forklore)와 달리, 독일 민속학은 당시의 독일 농민의 삶 전체를 대상으로 했으며 상당히 사회 과학적이었다. 근래 한국연구재단은 민속학을 인류학의 하위 분야로 학술 연구 분류를 하고 있으나 민속학자들이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해방 후 1946년에 손진태, 나세진, 송석하 등은 대한인류학회를 창립하여 회보를 발행하고 강연회 발표회도 개최했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활동이 중단되었고 서울대 문리대학장이던 손진태는 납북되었다. 송석하는 군정청의 유진 크네즈(Knez, E. I.)와 협력하여 1946년 국립 민족학 박물관(National Museum of Anthropology)을 개관하고 서울대학교에 인류학과를 설치하려 했으나 송석하의 사망과 6 · 25전쟁으로 국립 민족학 박물관은 국립 박물관에 흡수되고 학과 설치도 실현되지 못했다. 1958년에 이르러 임석재, 이두현, 장주근, 임동권 등이 한국문화인류학회를 창설했고 이해영은 인류학 관련 개론서를 출간했는데, 모두 인류학에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진 인접 분야 학자들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한국문화인류학회는 1968년 창립 10주년이 되던 해에 학술지 『한국문화인류학』을 창간했으며, 1970년대 후반 이광규, 한상복, 강신표 등이 학회를 이끌면서 전문적인 인류학자들이 중심이 되는 한국 인류학의 대표 학회로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 인류학은 1970년대 이후 전문적인 인류학자들의 주도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영미권 인류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미국의 ‘문화 인류학’과 영국의 ‘사회 인류학’의 전통에서 발전한 이론과 방법론을 전적으로 수용했으며, 상대적으로 유학생이 적었던 프랑스, 독일 등 유럽 다른 국가나 일본 인류학의 영향은 크지 않았다. 미국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학문적으로도 크게 발전하여 여러 분야를 주도하게 되었고 영국은 강력한 인류학 전통과 함께, 미국과 같이 영어 사용 국가였기 때문이다. 외국의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한 인류학자들이 당대의 새로운 이론과 방법을 강조하는 경향도 있었고 이에 대한 문제의식은 한국 인류학 내에서 지속되고 있다.
인류학 관련 학과는 서울대학교에 1961년 고고 인류학과로 설치되었다가 1975년 분리되어 인류학과는 사회과학대학, 고고학과는 인문대학 소속이 되었는데 이후 고고학과는 고고 미술사학과가 되었다. 영남대학교에는 1972년에 문화 인류학과가 설치되었다. 이후 경북대학교(1980),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1982), 강원대학교(1988), 전북대학교(1988), 목포대학교(1988), 전남대학교(1992)에 각각 인류학 관련 학과가 설치되었다. 인류학 관련 학과는 처음부터 (문화)인류학으로 출발한 경우(강원대학교, 덕성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도 있지만, 영남대학교와 한양대학교(이상 문화 인류학과), 전북대학교와 목포대학교(이상 고고 문화 인류학과), 전남대학교(문화 인류 고고학과) 등은 하나의 학과 내에 인류학과 고고학이 병존하는 형태로 개설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는 한국학 대학원 문화 예술학부에 인류학 · 민속학 전공으로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은 학과 설립 당시 해당 대학의 사정 때문인데, 다른 나라에서도 인류학과 고고학은 하나의 학과로 통합되기도 하고 다시 분리되기도 한다.
형질 인류학은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시절에 의학부에서 체질 인류학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해부학 교실이 담당했고 위생학 교실과 법의학 교실에서도 관련 연구가 수행되었는데 주로 인종 및 우생학이었다. 형질 인류학은 해방 이후에도 서울대학교 의대나 고고학 관련 학과에서 조금씩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인간의 신체와 관련된 연구와 조사는 의학이 배타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인류학의 분과로 성장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에서는 인류학이 문화 인류학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최근에야 의학과 인류학 훈련을 모두 받고 형질 인류학이나 의료 인류학 연구에 종사하는 연구자들이 등장했다.
인류학은 압축 성장을 하면서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세계화를 경험하는 한국 사회를 이해하고 문제와 고통을 해소하거나 줄이는 것은 물론 한국의 미래에도 매우 독특하게 기여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대화, 경제 발전, 안보 등 근대 한국 사회의 과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비실용적인 학문이라는 오해와, 무지 때문에 정부나 학계 일반의 관심과 지원을 많이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며 입시 지도 교사와 학부모들로부터도 외면을 받는 ‘비인기학과’였다.
인류학과는 1980년대에 대학이 급격히 팽창하던 시기에도 사립 대학교는 안산에 1곳, 국립 대학교는 지방에 5개가 설립되었을 뿐, 서울 소재 소위 명문대에는 새로 설립된 곳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에도 서울대학교와 영남대학교 등이 일찍부터 대학원 과정을 운영해 왔고 점점 해외에서 유학하는 인류학도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학 내에 제도적 기반이 취약했던 까닭에 인류학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이나 1996년 오이시디(OECD) 가입과 세계화의 붐 등을 학문의 외형을 크게 성장시킬 기회로 삼지는 못했다.
초창기의 한국 인류학계는 인접 분야의 학자들이 개척하고 이끌었다. 이들은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연구하며 인류학적 지식과 방법을 활용하려 시도했으며, 국어국문학,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종교학, 교육학, 의학 등 여러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관심과 기대와 애정을 갖고 참여했으며 학회의 설립과 학과의 설치에 많은 지원을 해 주었다. 당연히 연구의 주제나 관심사도 한국의 농촌, 어촌, 산촌의 상황이나, 민속과 구비문학, 연희(演戲) 등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방법론적으로도 근대 학문으로서 인류학이 자랑하는, 장기적이며 철저한 현지 조사(intensive fieldwork)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외국에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들이 귀국하여 대학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농촌, 어촌, 산촌을 연구하더라도 이론적 · 방법론적으로 상당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외국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고는 해도 상당수는 한국 자료를 가지고 논문을 작성했으며 심지어 다른 문화를 현지 조사하여 학위를 받았다 해도 일단 귀국하여 국내 기관에 취직하고 나면 대개 한국 사회에 대한 단기적 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해외 지역의 연구비를 받을 수 있는 제도적 기회는 1990년대 중반 이후에야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80년대는 한국인과 한국 문화의 특성을 ‘고전적’ 인류학의 이론과 방법으로 탐구하거나 동시대 한국 사회의 현실과 모순을 마르크시즘의 영향을 받은 시각으로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수는 적지만 여성 인류학자들은 한국 사회의 젠더 문제에 주목하면서 여성주의적 문제의식과 연구를 확산하는 데 매우 크게 기여했다. 한편 자료로서의 기억과 기록 등 문자를 가진 사회를 연구할 때의 연구 방법과 연구 대상에 대한 고민은 부족했다. 이에 대해 비록 소수이기는 했으나 한국은 소위 ‘고전적’ 인류학이 연구했던 상대적으로 고립된, 소규모의 무문자 사회가 아니라 2천 년 가까운 국가 조직과 문자 기록을 경험한 사회였기 때문에 근대 인류학의 이론과 방법 외에 한문과 이두로 된 자료를 읽을 수 있는 능력과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절실하다는 문제의식도 대두되었다.
1980년대 이후 해외 유학자들 상당수가 해외에서 현지 조사를 하게 되고 1990년대에 들어와 지역 연구비가 대폭 증액되어 일부 대학원생도 해외 지역 연구가 가능한 환경이 조성되면서 한국의 인류학자들도 세계 여러 지역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과 중국과 동남아 등을 비롯하여 지역 전문가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가운데 2001년 9.11 테러 이후에는 이슬람에 대한 국내 전문가가 너무 부족하다는 경각심에서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을 통해 해외 지역의 연구비가 대폭 증액되었다. 국내 대학에 일본학과, 중국학과 등의 지역학과 또는 국제 지역학부가 신설되거나 어문학 계열 학과와 학부들 가운데 다수가 문화 연구나 지역학을 표방하면서 문화 인류학자들의 취업과 연구의 기회가 교양학부 외에 지역학 관련 학과 등에도 일시적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1990년대에 지방 자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지방에서도 문화에 관련된 연구 기회와 일자리가 늘어났다. 중앙 정부 또한 문화와 발전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문화 정책과 관련하여 다양한 제도와 사업이 진행되면서 취업과 연구의 기회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한국문화인류학회 내에서 일부 비수도권 지역 대학 인류학과 교수들이 향후 문화 정책 관련 예산과 취업 기회가 크게 늘어날 것이므로 학회 차원에서 ‘문화 기획사’ 과정을 만들고 수료증을 주어 졸업생들의 사회 진출에 도움을 주는 한편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근래 대학 입시에서 ‘자격증’을 받을 수 있는 전공이 취업에 유리하다는 인식하에 학과의 인기가 결정되는 것을 보면 아쉬운 점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에서는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창설 후 무려 36년 만인 1997년 덕성여자대학교에 인류학 전공이 신설되었고 연세대학교에도 2008년에 문화인류학과가 신설되었다. 한편 학부에만 인류학과가 설치되어 있던 대학들에 석사 과정과 박사 과정이 설치되기 시작했으며,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대학원 과정의 설치로 각 대학이 교수 요원과 연구자의 재생산을 시도하게 되어 지역의 문화 관련 기관에서 활동할 인력이 양성되었으며 지역에서 연구소를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정부에서 BK사업을 시작하면서 인류학과들도 이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2006년에는 전북대학교와 전남대학교가 BK사업의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었고 이후 서울대학교, 경북대학교, 영남대학교 등도 선정되었다. BK사업에 선정된 대학은 대학원생에 대한 지원이 확대되었고 연구와 학문 활동에서 다양한 기회가 열리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대학원의 활성화가 촉진되었다. 전북 지역의 문화 운동가, 시민 사회 운동가, 문화 관련 기관 단체 직원들이 전북대학교 대학원 인류학과에 진학하여 지역 운동, 문화 정책, 도시 연구를 통해 지역 사회의 운동과 사회 문화 정책에 새로운 기여를 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원의 활성화가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다.
인류학과와 관련 연구소의 증가로 한국문화인류학회를 비롯한 다양한 학술 모임에서 인류학자의 활동과 기여가 늘었다. 서울대학교 비교문화 연구소나 한양대학교 글로벌 문화 연구원처럼 인류학과에서 설립했거나, ‘인류학’이라는 이름이 들어가지 않았더라도 목포대학교 도서 문화 연구원이나 인천대학교 중국 · 화교 문화 연구소, 전북대학교 쌀 · 삶 · 문명 연구원 등과 같은, 여러 대학의 연구소에서 인류학자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며 중요한 연구 과제를 수행하고 인류학적 관점을 확산해 나가고 있다. 인류학적 민족지 연구 성과들을 출판하기도 하고 여러 분야에서 협업하며 인류학의 가능성을 넓히고 있다.
인류학 전문 학술지 역시 부침을 겪고 있지만 『한국문화인류학』과 『비교문화연구』는 대표 학술지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인류학 서적 역시 전문 학술서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교양서들이 출판되고 있고, 특히 인접 분야의 전문가와 번역자들이 다양한 서적을 번역 · 출판하고 있다. 또한 인류학에 대한, 학계와 대중의 무지와 오해와 편견은 많이 줄어들었고 한국 사회의 글로벌화가 진전됨에 따라 인류학의 필요성이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다양한 분야에 인류학 전공자와 인류학자들이 진출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인류학적 지식이나 성찰이 뚜렷한 목소리를 내기에는 무엇보다도 연구자의 수가 너무 적고 분산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해외 지역 연구비가 증가하면서 한국의 인류학자들이 해외 지역에서 장기간 철저한 현지 조사를 할 수 있게 되고 취업이 확대된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었으나, 지역 연구비의 집행 방식 때문에 이들은 귀국 후 동료 인류학자들보다는 자신의 지역을 연구하는 인접 학문 전문가들과 공동 작업을 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인류학자의 수는 조금씩 증가하고 있으나 정작 인류학계에서는 연구 과제의 수행과 발표만 풍성하지 인류학자들 간의 진지한 소통과 논의가 부족하다는 반성도 나오고 있다. 인류학자가 증가했다고는 하지만 다수는 각종 연구소나 사회학과, 사학과, 지역학과, 국제학부(대학원) 등 인접 분야나 교양 학부에 분산되어 재직하고 있다. 인류학자는 대개 특정 지역이나 주제에 관한 치밀한 현지 조사에 기반하여 구체적 연구 성과를 내는 것이 커다란 장점이지만, 이 장점은 이론적 논의의 확장과 발전에는 종종 한계로 작용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수적으로 그리 많지 않은 인류학자가 인접 학문 분야 또는 각 지역과 관련하여 연구 과제를 수행하고 인류학에 대한 외부 기대에 부응하여 구체적 성과를 내면서 활발히 활동하려다 보니, 공동 작업과 지역 연구 수준을 뛰어넘어 인류학적 논의를 발전시키고 이론적 진전을 이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여전히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의 양적 성장에 걸맞은, 깊이 있는 소통과 토론 그리고 서로의 연구에 대한 관심과 리뷰를 축적해 나가기 위한 장기적 노력이 필요하다.
한편 대학에 겨우 10개가 설치된 인류학과 또는 전공들도 교수진의 수가 매우 적으며 그나마 상당수는 고고학과 동거하고 있어 국내에서는 그 어느 학과나 연구소도 소위 임계 질량(critical mass)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대학에서 서서히 기반을 확대해 오던 인류학은 2010년대 후반부터 시련에 직면해 있다. 청년 취업난의 심화로 대학 교육이 취업 위주로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져 가는 가운데 인류학은 새삼 ‘유용성’과 ‘경쟁력’을 요구당하고 있다. 더구나 인구 감소가 대학 신입생의 감소로 이어지면서 전국적 규모로 학과 통폐합과 구조 조정이 논의되고 있다. 학과에 대한 평가에서 취업률 배점이 높아지면서 학과 정원 및 교원 배정이 축소되면서 학과가 전공으로 바뀌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학문의 유용성과 경쟁력을 해당 대학의 전공 졸업생의 취업률과 연계시키려는 경향이 대학 사회 내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민속학의 경우는 1998년에 중앙대학교에 창설되었던 민속학과가 2010년에 비교 민속학과로 바뀌더니 2013년에는 구조 조정으로 폐지되고 말았으며, 1972년에 설립된 안동대학교 민속학과는 2023년부터 문화유산학과로 바뀐다.
학회 활동 역시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하였으나 학계의 구심점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들린다. 인류학자의 연구 분야가 주제나 지역 전공 면에서 다른 학회와 중첩되기에 학술 활동이 분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문화인류학회는 학회 중심의 연구와 교육을 고민하며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한국문화인류학회는 꾸준히 교육과 연구에 관한 성찰과 모색을 해 왔다. 20주년을 맞아 ‘인류학과 인접 과학’에 대한 심포지엄을, 30주년을 맞아 인류학의 주요 분야를 성찰하는 ‘인류학 30년’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40주년 때는 인류학 교육, 특히 방법론과 개론 교육의 충실화와 인류학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을 지원하여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1998)를, 또한 현대 한국 사회에 적실성이 높은 입문서로서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2003)을 출간하기도 했다. 특히 후자는 세계에서 둘째로 많은 전문 인류학자를 보유한 일본에서도 못한 일이라는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50주년에는 『문화인류학 반세기』(2008)를 출간했으며 60주년(2018)에는 ‘인류학-하기’라는 세션(session)을 통해 국내 11개 대학(원)의 인류학 교육의 특성과 고민을 공유하기도 했다.
한국문화인류학회는 국제 학계와 교류하는 데에도 중심 역할을 맡아 왔다. 세계인류학회, 미국인류학회, 동아시아인류학회 등 다양한 학회와 교류를 하면서 한국 인류학을 대표하고 있다. 한국 학계 내에서도 사회 과학 분과의 학회들과 함께 한국 사회 과학 연구 협의회 활동에 참여해 왔고, 시의적절한 주제를 발굴하여 다양한 파트너와 협력하며 국제 학술 대회와 전국 규모의 학술 대회를 꾸준히 개최하고 있다. 후속 세대를 지원하는 독회 및 소연구회 모임을 지원하고 있고, 학회 회원들이 독회 모임을 운영하기도 한다. 인류학의 하위 분야별 학회도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영상인류학회는 한국문화인류학회와 협업하며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질적 연구를 수행하는 교육학자들이 설립한 교육인류학회는 회원의 규모나 학술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 인류학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관련 학회는 지역 연구 학회가 많다.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 인도, 중남미, 아프리카 등 다양한 지역의 연구 학회에서 인류학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의 인류학자들은 또한 재외한인학회, 한국국제이해교육학회, 한국이민학회, 한국가족학회, 한국환경사회학회 등 여러 관련 학회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한국 인류학은 상대적으로 개설 학과나 연구자의 규모가 사회 과학 중 가장 작음에도 불구하고 학계에 꾸준한 기여를 해 왔다. 한국학이라는 이름과 분야가 생소했던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한국 사회와 문화 연구에서 현지 조사와 참여 관찰이라는 경험론적 연구를 통해 이론 정립과 학문적 분석을 위한 토대를 닦았다. 또한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소장학자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 분석을 시도했다.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한국 사회에 대한 연구의 단초를 마련했던 것도 이 시기였으며 한국의 페미니즘 연구와 이론적 논쟁에도 인류학자의 공헌은 매우 중요했다. 특히 다양한 해외 지역을 현지 조사한 경험이 있는 9명의 여성 인류학자들이 지리학과 국제 개발학을 전공한 3명의 여성 연구자들과 함께 출간한 『여성 연구자, 선을 넘다: 지구를 누빈 현장 연구 전문가 12인의 열정과 공감의 연구 기록』(2020)은 해외 지역 연구 분야에서 한국 여성 인류학자들의 성장과 활동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집단 기억과 사회적 기억에 관한 역사 인류학 연구는 향후 한국전쟁을 비롯한 현대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방법론을 정립했고 역사학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인류학의 해외 지역 연구가 급성장하면서 해외 지역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국제 지역 연구 학회에서 장기간의 현지 조사를 통한 인류학의 전문성이 지역 연구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인 성장과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중견 학자들은 모두들 자기 연구와 발표를 하고 있을 뿐 학계에 치열한 논쟁과 비판이 없다는 사실에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다. 물론 한국의 사회 과학계 전체가 연구 주제와 질문의 선택, 방법론, 자료의 수집과 처리, 논지의 전개 등 학문적 성과에 대한 냉정하고 치밀한 논의와 성찰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이는 인류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러한 가운데 연구소나 기업이나 공공 기관에 자리를 잡은 인류학자들은 한국 대학의 인류학과들이 학술 논문에 치중하여, 한국 사회의 당면 과제나 정책 의제에 관한 정책 연구, 사회적 의제의 선도적 담론 구성 등이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또한 입시 성적에 의한 위계적 서열화에서 주변화된, 대학의 인류학과에서 실제 현실에서 통계 수치를 포함하여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하여 보고서나 논문을 작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재들을 양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한국의 근대 학문, 특히 인문학과 사회 과학은 일제강점기와 분단, 한국전쟁, 그리고 압축 성장 등을 겪으며 도입되고 성장했기 때문에 발전 과정에서 미묘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고민과 논쟁을 거쳐 사상과 이론을 전개한 치열한 경험이 없이 서구에서 오랜 세월을 거치며 발전한 개념과 이론과 방법론을 한꺼번에 받아들이고 급히 소화를 시키려다 보니 학문적 논의의 시대적 배경과 맥락까지 파악하면서 천착하고 반추하기가 어려웠다. 때로는 자신이 특정 시기나 상황에서 접했던 이론이나 연구 성과물을 과대평가하거나, 심지어는 개인적인 해외 유학 경험을 일반화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학문의 중심은 여전히 서구의 유명 대학들이고 한국은 소위 주변부에 속하는 상황인데, 그나마 한국에서는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크고 대학이 심하게 서열화되어 있어 서울의 몇몇 대학을 제외한 나머지 대학의 교수들은 이중으로 ‘변경’ 또는 ‘주변부’라는 의식을 느끼게 된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인류학의 교육과 목적이, 학과가 소재한 대학과 입학하는 학생들의 특성과 학업 능력과 장래 희망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고, 대학에 따라 인류학 전공 교육의 내용은 물론 질적, 양적 격차가 크며 교수들 사이에서도 학부와 대학원 교육의 중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놓고 의견 차이가 있다.
인류학은 인문 사회 과학 분야 가운데에도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 등 영어권 학계의 영향이 압도적인 학문인데, 소위 재경 명문대로는 아주 오랫동안 서울대학교에만 인류학과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중심과 주변의 문제가 이중적으로 가장 심각한 학문 분야이다. 국내 인류학계가 지나치게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수도권 밖의 거점 국립대에 설립된 인류학과가 대학 입시의 위계적 대학 서열 구조에서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상황은 한국 인류학의 중심과 주변의 문제를 악화시켰다. 이는 한국에서 인류학이라는 학문의 정의, 대상, 방법론, 관심과 질문, 후속 세대 양성 등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예를 들자면 근대 고고학과 언어학이 일찍부터 독자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던 유럽과는 달리, 아메리카 원주민의 언어와 유물, 신체적 및 인종적 특징을 이들의 사회 조직이나 문화와 함께 연구했던 미국에서는 인류학과라는 한 지붕 아래에 고고학, 언어인류학, 체질(體質) 인류학 등이 문화 인류학과 함께 3~4개의 분과를 이루며 전략적으로 동거하게 되었고, 이것이 마치 인류학의 고유한 특징인 것처럼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서울대학교 인류학과는 고고학과와 분리되어 사회과학대학 소속이 되었으나 1990년대에 들어와 ‘본래의 인류학’이란 4개 분과 체제로서 문화 인류학이 체질 인류학, 언어 인류학과 같이 있어야 한다며 고고학 대신 민속학을 넣어 4개 분과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중심과 주변이라는 문제는 영미권 인류학을 기준으로 ‘본래’의 인류학을 논의하는 경향을 부추겼으며, 인접 분야의 학자들이 개척한 한국 인류학계의 ‘전문화’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과 갈등을 초래했다. 학계에서 입지를 구축하려는 노력으로 인류학의 정체성과 관련된 방어 기제를 작동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해 동안 국내에서 가장 많은 수강생이 몰렸던 개론 강의에 대해 ‘진짜’ 인류학이 아니라며 이를 담당했던 소장학자에게 “인류학의 깃발을 내려라.”라고 요구하거나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이끌어온 원로 인류학자들의 출신 학과와 계보를 거론하며 한국 인류학이 ‘본래’의 모습으로 발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비난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어느 소장학자가 “순 · 진짜 · 참 인류학의 추구”라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지나치게 경계를 강화하고 좁힘으로써 인류학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던 일부의 움직임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하고 필요한 일과, 각자가 연구와 조사를 하면서 체득한 지적 경험을 담아내는 장(場)을 만드는 작업에 장애가 되었다. 인류학은 그 어느 학문보다도 기존의 관념과 경계에 근본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동시대의 지적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역할을 해 왔으며, 특히 타문화 연구를 통해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거나 자신의 문화의 ‘당연함’에 의문을 제기하며 근대 학문으로 성립한 학문이다. 지적 용기와 자유로운 상상력이야말로 인류학의 생명력이며 매력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순 · 진짜 · 참 인류학의 추구”는 오랜 기간 인류학자들이 키워 왔던 인류학의 전복(顚覆)과 변혁의 힘을 오히려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인류학에 대한 오해가 만연해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인류학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는 입장에도 타당성은 있다. 그러나 활력과 다양성을 담아내지 못하고 스스로 인류학의 경계를 강화하는, 이러한 자발적 구속과 내부 검열이야말로 한국 인류학이 극복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영미 인류학에서 1990년대와 2000년대를 휩쓴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인류학 비판은 국내에서는 그리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않았으나 많은 인류학자들이 비판의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다만 이론적 논의를 넘어서 한국 인류학에 대한 성찰이나 연구 방법론과 민족지 작성의 구체적 적용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편 서구의 인류학을 수용하여 한국에서 인류학 연구와 교육에 종사하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이 배운 인류학이 문제투성이라는 비판에 다소 곤혹스러워하거나 ‘식민주의를 비판한다면서 비판의 담론까지 중심에서 수입하는 것’이라며 우려를 표시하기도 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에 해외에 유학하거나 인류학에 입문한 사람들 가운데는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어쩌면 이러한 비판은 아주 새로운 것도 아니었고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비서구인 인류학자가 보기에는 다소 호들갑스러운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현지 조사 방법론과 글쓰기에 대한 문제 제기는 매우 중요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이 소위 선진국의 하나가 되었고 국내 현장에서도 인류학자는 학문 권위를 가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한국인 인류학자가 해외 현지 조사를 하거나 한국에서 ‘원주민 인류학(native anthropology)’ 작업을 시도하고자 할 때 직면하는 문제는 본질적으로 같은 부분도 있지만 상당히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상당수는 오히려 그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는가 등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더 중요하다고 간주한 것 같다. 다만 인류학이 무문자(無文字) 사회를 많이 연구하면서 발전했기 때문인지 한국인 인류학자들 가운데 문자 사회 한국을 연구하는 방법과 시각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여전히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재 한국의 인류학이 ‘사회의 주목을 끌지 못하고 학문적 주류 세력으로 구축되어 있지 않고 있는 유감스러운 현실’이라는 50년쯤 전의 어느 학계 원로의 개탄에서 아직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류학자의 절대 수가 부족하고 연구소나 대학 어느 한 곳도 역동적인 학술적 논의와 활동을 지속시킬 임계 질량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이 강의와 잡무와 연구 프로젝트 때문에 진중하게 공부할 시간이 부족한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한 가운데에도 자신의 현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상들을 예의 주시하면서 글로벌한 함의를 가질 수 있는 질문들을 제기하고 글을 써 내는 인류학자들이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