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는 세대 간의 차이와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영역이다. 서구의 역사에서 청년문화는 청년 세대가 부모 세대와 구별되는 가치와 취향, 태도와 행위를 보여주기 시작한 1950년대와 1960년대를 통해 사회학적 담론의 주제로 등장했다. 영미권에서 청년문화는 주로 노동계급 청소년 계층의 일탈적이거나 저항적인 하위문화(subculture)에 관한 관심과 함께 조명되었다. 1960년대에는 구미의 중간계급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베트남 전쟁과 인종 차별에 반대하고 기성 사회의 지배적 가치와 문화를 거부하는 운동(예컨대 히피 운동)이 벌어졌는데 이처럼 기성의 지배 문화에 저항하는 청년문화를 대항문화(counterculture)라 부르기도 했다.
한국에서 청년문화는 주로 1970년대 초반 대학생 층을 중심으로 서구의 라이프 스타일과 대중문화를 추종하는 흐름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처음 사용되었다. 한국의 청년문화는 1970년대 후반 유신체제가 대중문화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강제로 퇴출되었고 이후 청년문화라는 용어 자체도 많이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기성의 지배문화와 갈등하는 청년 세대의 문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에는 진보적 성격의 민중문화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는데 이런 문화운동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 대학이었고 대학생들의 진보적 민중문화가 당대의 기성 사회의 대중문화와 갈등을 빚었다. 1990년대 이후 10대 청소년 계층의 문화가 대중문화 시장의 주류로 등장하면서 청년문화 대신 청소년 문화 혹은 신세대 문화라는 용어가 논란의 대상으로 대두되었다.
한국에서 청년문화는 주로 1970년대 초반 대학생층에게 크게 유행했던 대중문화의 경향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청년 대학생층에게 인기를 모았던 통기타 음악과 생맥주, 청바지, 장발 등이 당대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요소들이었다. 이들은 서구에서 들어온 문화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당대의 청년문화는 기본적으로 청년 세대의 서구 문화에 대한 지향과 동경의 산물임을 드러낸다.
이런 현상은 대체로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1970년대 초반의 빠른 성장기를 거쳐 정치적 외압에 의해 사실상 강제로 퇴출되는 19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유행하였다. 이 시기는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이 급속한 경제성장 정책과 함께 개발독재의 성격을 강화하고 장기집권의 길로 나아가고 있던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였다.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청년 대학생들이 시대 상황에 대해 고민하고 저항적인 의식을 표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당대의 대학 문화가 첨예한 이념과 이론으로 무장한 학생운동 문화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당시만 해도 대학의 분위기를 주도한 것은 다소 낭만적인 엘리트 의식과 감성적인 자유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학생운동 세력이 청년문화에 대해 비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학생들이 청바지, 장발, 통기타음악으로 표상되는 청년문화에 열광했던 것도 바로 그런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70년대 청년문화를 간단하게 정치적 저항의 맥락에 위치시키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그보다는 기성세대와 구별되는 감성과 의식, 소비 성향을 가진 새로운 세대가 기성의 문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고자 했던 데에서 청년문화 특유의 문화적 성격이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저항의 문화가 아니라 차이의 문화라는 프리즘으로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사이에 대학생이 된 세대는 대체로 해방 이후에 태어나 미국식 교육제도 속에서 성장한 세대이다. 서구 문화의 영향 속에서 청년으로 성장한 이들 세대가 일본 문화의 절대적 영향 속에서 살아 온 기성세대와 생활 감각이나 가치 체계, 미적 취향에서 차이를 갖게 된 것은 당연하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그때까지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있던 식민지세대의 문화가 서구 문화의 세례를 받은 전후세대의 부상하는 문화와 격렬한 문화적 갈등을 일으킨 시기이며, 청년문화는 그런 갈등 과정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통기타로 대표되는 1970년대 청년문화의 부상을 두고 미국의 로큰롤 혁명에 비견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대혁명이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중요한 것은 1970년대의 청년문화가 전전세대와 전후세대, 일본 문화와 서구 문화 사이에서 드러나는 차이의 정치학에 기초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차이의 정치학을 대중문화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이 통기타음악이다. 당대의 청년 대학생들이 통기타에 열광했던 것은 그것이 기성세대가 좋아하던 뽕짝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었으며 특히 미국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감성적 차이가 구체적인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대학생을 기반으로 한 청년시장(Youth Market)의 형성이다.
당대의 대학생들은, 물론 지금의 젊은 세대와는 비교하기 어렵지만, 고도성장 과정에서 나름의 독자적인 구매력을 확보한 새로운 소비 주체들이었다. 이들이 생맥주를 마시고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배우고 노래 부르며 적극적으로 음반을 구매함으로써 청년문화는 구체적인 시장의 현상으로 등장하게 된다. 어느 시대에나 문화산업은 늘 가장 민감하고 적극적인 소비층을 겨냥하기 마련으로, 이 새로운 시장을 대상으로 한 상품 생산이 활기를 띠면서 청년들의 문화가 시장의 주류로까지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당대의 청년문화가 다분히 소비문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1970년대 초 청년세대가 청바지를 사 입고 생맥주를 마시며 통기타를 사서 배우는 행위는 단순히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행위였다기보다는 그 세대 특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상품의 소비가 기능적 의미 외에 기호적 의미를 도드라지게 갖는 이런 현상은 우리 대중문화사에서 대단히 새로운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초의 청년문화가 가진 이런 소비문화의 성격은 그것이 대학생이라는 사회적으로 혜택 받은 계층의 문화였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그러니까 이들의 문화 소비 행위는 비단 아버지 세대 문화와의 차이뿐 아니라, 그들과 다른 처지에 있는 노동계급 청년들과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대학진학률은 요즘보다 현저히 낮았고, 대학생이 되는 것은 비교적 혜택 받은 계층의 젊은이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사회를 이끌어 갈 엘리트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런 대접을 받았다. 1960년대 이래의 고도성장과 함께 경제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들 대학생들이 가정교사 등의 일을 통해 구매력을 가진 소비 계층을 형성할 수 있었고 이들의 소비문화는 그런 기반 위에 형성되었다.
하지만 군사 정권은 그런 청년 시대의 자유주의적 소비 문화 조차도 퇴폐적이고 방종하며 불온한 체제 불안의 요소로 간주하여 각종과 검열과 단속을 통해 억압하였다. 1975년에는 당시까지 발표된 모든 대중가요를 재심사하여 청년 세대의 인기를 모았던 많은 가요들을 금지했다. 또 당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었던 상당수의 가수와 연주자, 영화 감독 등이 대마초를 피웠다는 이유로 활동 정지됨으로써 1970년대 초반의 청년문화 붐은 사실상 시장에서 퇴출되게 되었다.
어느 시대에나 한 사회의 가장 새롭고 활기있는 부분은 젊은 세대의 문화라 할 수 있다. 젊은 세대는 시대의 변화와 세태의 흐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며 늘 기성세대와는 다른 문화를 추구한다. 이런 젊은 세대의 문화가 기성세대의 문화와 갈등하는 과정에서 사회 전반의 문화적 지형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년문화는 늘 첨예한 갈등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