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순왕후(章順王后)는 1460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이듬해인 1461년 11월 인성대군(仁城大君)을 낳고 12월 산후병으로 승하하였다. 이때 장순(章順)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상장(喪葬)은 현덕빈(顯德嬪, 문종 비 현덕왕후)의 예에 의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공릉은 맨 처음 세자빈묘로 조성되었으며, 세조(世祖)의 명으로 석실(石室)을 사용하고, 병풍석과 난간석은 사용하지 않았다. 파주의 보시동(普施洞) 언덕에 안장하였으며, 현재의 위치이다. 성종 즉위 이듬해인 1470년에 장순빈은 휘인소덕 장순왕후(徽仁昭德 章順王后), 능호는 공릉(恭陵)으로 추숭되었다.
공릉과 경릉은 1470년 함께 봉릉(封陵)되었는데, 세조 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능(陵) 위에는 마땅히 의물(儀物)을 갖추어야 할 것인데, 다만 생각하건대, 신도(神道)는 고요한 것을 숭상한다. 두 능(陵)은 안치(安置)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동요(動搖)시킬 수가 없으니, 그 의상(儀象)의 잡물(雜物)은 가설(加設)하지 말라.”라는 명으로 더 이상의 석물을 추가하지 않았다.
공릉은 가장 먼저 세자빈묘로 조성되었으며, 봉릉 뒤 석물이 추가되지 않아 이후 세자빈묘의 전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