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은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 승하 직후 자신이 합장될 수릉(壽陵)으로 오른쪽을 비워 두는 허우지제(虛右之制)를 채택하였으며, 능지는 자신의 원비(元妃)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1680) 익릉(翼陵) 남쪽으로 정하였다.
1720년 숙종 승하 후 인현왕후의 오른쪽에 합장되어 쌍릉(雙陵)으로 조성되었다. 1757년 인원왕후(仁元王后, 1687~1757)가 승하해 숙종릉 뒷편 언덕에 동원이강(同原異岡: 같은 영역 내에서 언덕을 달리하는 형식)의 형태로 능이 조성되었는데, 이곳은 숙종이 1713년 자리를 잡은 곳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은 쌍릉에 난간석(欄干石: 봉분 주위에 돌로 두른 난간)을 두르고 있으며, 석마(石馬) 2쌍,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각각 2쌍이 곡담 안에 있다. 봉분 앞에는 석상(石床) 2좌, 장명등(長明燈: 무덤 앞이나 절 안에 돌로 만들어 세우는 등), 망주석(望柱石) 1쌍, 문석인(文石人) 1쌍, 무석인(武石人) 1쌍이 있다. 인원왕후릉에도 석상 1좌 등 석물(石物)의 수량은 숙종릉과 동일하다.
능강 아래에는 망료위(望燎位), 정자각, 비각, 홍살문 등이 있으며, 수라청(수라간)은 터만 남아 있다. 명릉은 재실(齋室)도 남아 있다.
1720년 숙종과 인현왕후 명릉의 합봉 표석이 민진원(閔鎭遠, 16641736), 조태구(趙泰耈, 16601723)의 글씨로 건립되었으며, 1757년 영조(英祖) 어필(御筆)로 인원왕후 명릉 표석이 추가 건립되었다.
숙종은 명릉에 인현왕후, 인원왕후가 모두 안장되어 선조(宣祖), 의인왕후(懿仁王后), 인목왕후(仁穆王后) 3릉이 있는 목릉(穆陵)의 제도처럼 조성하길 원하였다. 더불어 숙종은 명릉을 조성하면서 석물 제도를 조선 왕릉 중 석물 크기가 가장 작은 정종(定宗)과 정안왕후(定安王后) 후릉(厚陵)에 준하게 하였다.
따라서 후릉 석물의 크기를 모두 정밀하게 실측한 뒤 이에 맞추어 명릉 석물이 제작되었다. 후릉의 제도를 명릉에 도입한 것은 검소함을 실천하기 위함이었으며, 이로 인해 석물 제작에 동원되는 석장(石匠) 등 인력, 물자 등을 줄일 수 있었다. 명릉은 1970년 5월 26일에 사적으로 지정된 ‘고양 서오릉(西五陵)’에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