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진원은 조선후기 대사성, 이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664년(현종 5)에 태어나 1736년(영조 12)에 사망했다. 민유중의 아들이며 숙종비 인현왕후의 오빠이다. 169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인현왕후가 복위되어 등용되었다. 『가례원류』의 간행을 둘러싼 당론이 치열해지자 노론을 옹호하였다. 경종 재위 연간에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관철시키는 등 노론의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탕평을 추진한 영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론을 배격하는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1691년(숙종 17)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나, 1689년의 기사환국 이후 인현왕후가 유폐되고 노론 일파가 크게 탄압을 받던 때여서 등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694년 갑술옥사로 장희빈(張嬉嬪)이 강봉(降封)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어 노론이 집권하자 이듬해 예문관검열로 기용되었다.
1696년 세자시강원 겸설서(世子侍講院兼說書)가 된 뒤 사서에 올랐으나 척신(戚臣)이라는 이유로 면직되었다. 이어 이듬해 이광좌(李光佐) 등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뽑히고 수찬(修撰)에 재등용되었으며, 그 해 중시(重試)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98년 병조좌랑이 된 뒤 사헌부의 지평 · 부수찬 등을 역임하고 1701년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이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
1703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서원 남설(濫設)이 지방 재정을 한층 곤궁하게 하며 당쟁을 더욱 치열하게 하는 것을 보고, 서원 건립을 억제하고 수를 줄일 것을 상소하였다.
1705년 공조참의가 되고 장희빈사건으로 부처(付處)된 남구만(南九萬)의 감형을 상소해 이를 실현시켰다. 이듬해 강화부유수를 지내고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지내던 중 1712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5년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간행을 둘러싸고 노론 · 소론간에 당론이 치열해지자 노론 정호(鄭澔)를 두둔하다가 파직,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노론이 득세하자 다시 등용되어 평안도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1718년 예조판서가 되어 양전구관당상(量田勾管堂上)을 겸하였다. 그 해 주청사(奏請使)로 다시 연경(燕京)에 다녀왔고, 이듬해 강화구관당상(江華勾管堂上)을 역임하였다.
이조판서 · 호조판서에 이어 1721년(경종 1) 공조판서로 있으면서 실록청총재관(實錄廳總裁管)을 겸해 『숙종실록(肅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또한 왕세제(王世弟: 후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건의해 실현하게 하는 등 정계의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이듬해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매 성주(星州)로 유배되었다가, 1724년 영조의 즉위와 더불어 노론이 집권하자 풀려나 우의정에 올랐다. 이어서 실록청총재관으로 『경종실록(景宗實錄)』 편찬을 주관하였다.
1725년(영조 1) 영조의 탕평책에 따라 소론의 영수인 좌의정 유봉휘(柳鳳輝)를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로 탄핵, 유배시켰으며, 송시열의 증직(贈職)을 상소하고 그 해에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었으나, 1727년 당색이 강한 자를 제거해 탕평하려는 영조의 정책으로 정미환국이 일어나자 파직되어 순안(順安)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729년 중추부판사가 되어 『가족제복론(加足帝腹論)』을 찬진(撰進)하였다. 그 뒤 당쟁을 종식시키려는 영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진원은 끝까지 소론과 타협하지 않고 소론을 배격하는 노론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1730년 기로소에 들고 173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특히, 글씨를 잘 쓰고 문장에 능해 강릉의 송담서원비(松潭書院碑), 선산의 고려예의판서농암선생신도비(高麗禮儀判書籠巖先生神道碑), 여주의 여양부원군민유중신도비전액(驪陽府院君閔維重神道碑篆額) 등을 썼다.
저서로는 『단암주의(丹巖奏議)』 · 『연행록(燕行錄)』 · 『단암만록(丹巖漫錄)』 · 『민문충공주의(閔文忠公奏議)』 등이 전한다.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