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중집(仲集). 민사용(閔思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흥고영 민여건(閔汝健)이고, 아버지는 부윤 민기(閔機)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1616년(광해군 8) 진사에 합격하고 인조 초 음보(蔭補)로 별검(別檢)이 되어 출사하였다.
1628년(인조 6) 알성 문과에 장원한 뒤, 정언과 지평 등을 거쳐 1635년 홍문관에 등용되고, 1644년 교리, 이듬해 사간, 1649년(효종 즉위년) 통정(通政)으로 승진하여 사복시정(司僕寺正)과 안변부사를 거쳐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652년 승지에 오르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재변을 보고하지 않은 죄로 삭직되었다.
1656년 다시 복직되어 병조와 공조의 참의를 지냈다. 성색(聲色)을 멀리하였고 치가에는 법도가 있었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는 현명한 관리라는 평을 들었다. 안변부사로 있을 때, 가난한 부민을 돕기 위하여 많은 비용을 아껴서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부민의 생활을 도와준 사실이 있다.
병자호란 때는 청군이 몽고병과 함께 강화도에 침입하자 강화도의 수비가 허술하여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종묘서영(宗廟署令)으로 송국택(宋國澤)과 함께 그곳에 피신중이던 원손(元孫)을 데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바다를 건너 교동(喬桐)을 거쳐 인근 섬으로 피신하여 무사하였다. 난이 그친 뒤 원손을 호위한 공으로 통정으로 승진하여 호조참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