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장오(章五), 호는 수월당(水月堂).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민성휘(閔聖徽)이고, 아버지는 목사 민진량(閔晉亮)이며, 어머니는 첨정(僉正) 유대비(兪大備)의 딸이다.
1648년(인조 26) 진사가 되고 1653년(효종 4) 알성 문과에 장원하고, 성균관전적, 공조·예조·병조의 좌랑, 춘추관기사·황해도도사·병조정랑·성균관직강·장흥현감·충청도도사·시강원사서·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인천부사로 임명되어서는 그곳에 있는 자연도(紫燕島)에 대한 국방시설을 엄중히 하여 후환이 없게 하였다. 그 뒤 길주목사를 거쳐 광주부윤으로 초수(超授)되었으며, 내직에 들어와서는 승정원동부승지·장례원판결사·승정원승지를 역임하였다.
1669년(현종 10) 경주부사(慶州府使)로 임명되어서는 특히 궁핍한 부민에 대한 시혜가 돈독하여 부민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또 경주가 옛 도읍지인데도 고증할 만한 자료가 없자. 편자 미상의 『동경지』라는 경주 읍지를 저본으로 향중(鄕中) 인사 이채(李採) 등과 함께 이를 증보해서 『동경잡기(東京雜記)』3권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