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정순(靜純), 호는 지재(趾齋). 민기(閔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이고, 아버지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자 유수 민진원(閔鎭遠)과 현감 민진영(閔鎭永)의 형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1년(숙종 7) 생원이 되고, 1686년(숙종 12)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기사환국이 일어나 아버지를 비롯한 일가 친척들과 함께 관작을 삭탈당하고 귀양살이를 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로 다시 기용되었고, 사간원정언·홍문관부교리·부응교·사헌부집의 등을 거쳐 1697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관찰사로 부임한 지 7개월 만에 사간원대사간이 되었으며, 이어 강화부유수·형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뒤 1706년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가 되었다. 이 때 유생 임보(林溥)가 세자 모해설(世子謀害說)을 발설해 일어난 옥사를 함부로 다뤘다고 해서 소론측의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1717년 또다시 기용되어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를 다녀온 뒤, 의금부판사·돈녕부판사·홍문관제학·예조판서 겸 수어사·한성부판윤·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719년 의정부우참찬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그 뒤 개성부유수로 재직 중 죽었다.
인품은 선비의 기운을 돋우고 사문(斯文)을 지키는 데 힘쓰며, 외척의 호화로운 습속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글씨에 능해 여양부원군민유중신도비(驪陽府院君閔維重神道碑)의 비문을 썼다. 경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저서로는『지재집(趾齋集)』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