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아버지는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고, 어머니는 은성 부부인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1681년(숙종 7)에 15세의 나이로 가례(嘉禮)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왕비가 된 초기에 출궁된 궁인 장씨〔 희빈 장씨〕를 다시 불러들여 후덕한 왕비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장씨가 숙종의 총애로 점점 교만해져 회초리로 다스린 적이 있는데, 이것이 질투를 하였다는 빌미가 되었다.
숙종은 경종이 태어난 후 인현왕후가 질투 때문에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 않았다며 폐서인하고 사가에 나가 살게 하였다. 이때 장씨 측의 남인이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이 있었다. 그러나 5년 후 김춘택의 인현왕후 복위 논의가 갑술옥사로 이어지면서 숙종은 1694년(숙종 20) 4월 12일 삼불거(三不去)를 언급하면서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
당시 집권당인 소론의 반발이 심하여 6월에 다시 책비례를 올리고 왕비로 등극하였다. 1700년(숙종 26년) 3월에 발병한 괴질로 투병하다가 1701년 8월 14일에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사망하였다.
이때에 병에 시달리게 된 것이 희빈 장씨의 저주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희빈 장씨가 저주한 것으로 기정사실화되면서 장씨는 사약을 받았다. 이 괴질은 훗날 통풍으로 추정되었다. 궁녀가 쓴 『 인현왕후전』이 전해지고 있다. 훗날 영조는 인현왕후의 덕을 기리고자 폐서인으로 머물렀던 사가에 감고당(感古堂)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감고당에는 훗날 5대 후손 명성황후가 잠시 거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