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인 ()

목차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외명부(外命婦)인 왕비모(王妃母)와 종친처에게 내린 정1품 작호(爵號).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 외명부(外命婦)인 왕비모(王妃母)와 종친처에게 내린 정1품 작호(爵號).
내용

왕비의 친정어머니와 종친인 대군부인에게 주던 작호로 품계는 정1품이다.

왕비어머니의 봉작은 중국의 송나라 외명부제도에서 황후와 왕비의 어머니를 각각 국태부인(國太夫人)과 군태부인(郡太夫人)에 봉한 것에서 시작된다.

고려는 송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현종비의 어머니인 김은부(金殷傅)의 처를 안효국태부인(安孝國太夫人)에 봉한 것을 시초로 공양왕 때까지 18인 정도의 국태부인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는 고려의 제도를 한편으로 계승하면서 정비하였다.

태종 때 명부(命婦)를 봉작하는 법식에 따라 왕비의 어머니인 보국부원군(輔國府院君)의 처를 모한국대부인(某韓國大夫人)이라 정했고, 태종비인 정비의 어머니 송씨와 세종비인 공비(恭妃)의 어머니 안씨를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하였다.

그러나 신하의 처에게 ‘국(國)’자를 붙이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여 ‘모부부인(某府夫人)’으로 정해 ≪경국대전≫에 제도화하였다.

부부인(府夫人) 명칭 앞에는 본인이나 남편의 관향, 기타 연고지 등의 읍호를 붙였다. 부부인은 지존한 왕비의 어머니로서 국가의 예우가 극진하였다.

왕비가 의장을 갖추고 친정에 거동하여 부부인을 모시고 내외명부들이 시연한 가운데 잔치를 베풀기도 하고, 왕과 왕비가 함께 부부인을 모시고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부부인이 죽은 뒤에도 모든 장례 절차는 공주의 상장제도(喪葬制度)에 따라 거행하였다.

대군부인인 부부인은 고려시대 제군(諸君)의 처와 함께 옹주(翁主)로 봉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그대로 옹주라 하다가, 그 뒤 명부봉작(命婦封爵)의 법식에 따라 대군을 정1품 대광보국대군(大匡輔國大君)으로 정하면서 대군의 처도 삼한국대부인으로 봉하였다.

역시 ‘국’자를 붙이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여 왕비의 어머니와 함께 부부인이라 일컫고 도호부 이상의 관호를 사용하게 하였다.

대군의 처는 왕의 며느리로서 최고의 품계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궁중의 모든 행사에 참석하고, 죽은 뒤에도 모든 절차는 국가에서 정한 예장(禮葬)에 의하였으며, 부부인의 족친까지도 혜택을 받았다. 즉 부부인의 부(父)의 품계를 정1품에 추증하고 이에 따른 물질적인 은전도 받았다.

참고문헌

『고려사』
『태종실록』
『세종실록』
『단종실록』
『송사(宋史)』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