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평(蕩平)’이란 ≪상서 尙書≫의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제5조인 <황극설 皇極說>의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에서 나온 말로서, 본래는 인군(人君)의 정치가 편사(偏私)가 없고 아당(阿黨)이 없는 대공지정(大公至正)의 지경(皇極)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송대(宋代)의 주자(朱子) 또한 그의 붕당관(朋黨觀)을 피력한 <여유승상서 與留丞相書>에서 붕당간 논쟁의 시비(是非)를 명변(明辨)함에 의한 조정의 탕평을 말하였다. 따라서 탕평이라는 말은 특정 시대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인군정치의 지공무사(至公無私)를 강조하는 보편적인 의미로 쓰여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 처음 사용되는 용어로 이것이 나오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선조말 동서분당 이후부터 시작된 당쟁은 왜란이 수습되면서 더욱 어지럽게 전개되어갔다. 파당간의 싸움에서 당론은 국가의 안위(安危)나 민생의 휴척(休戚)에 관계되는 정강(政綱)이나 정책이 아니었다.
이들 주장의 대부분은 왕실의 복상제(服喪制)와 같은 의례적인 문제 또는 세자책봉·왕비책립과 같은 궁중의 변동을 계기로 삼아 다른 정파(政派)를 배제해 정권만 장악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따라서 대립하는 파당간의 싸움은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파당간의 싸움에서 성공하면 권세를 누리고 실패하면 찬축(竄逐 : 귀양보냄)과 주륙(誅戮)이 뒤따르는 것을 알면서도 당쟁은 계속되었다.
군주전제(君主專制)가 확립된 왕조시대는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고 군주의 자의(恣意)가 정국의 변동에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리고 당인(黨人)은 이러한 면을 틈타 그 감정을 격동시킴으로써 정국의 변동을 가져오는 예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당쟁의 폐습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군주의 태도 역시 당쟁을 조성하는 데 큰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조선 후기로 오면서 당파의 세력이 서로 강화되면서 일당의 전제(專制)로 진행되는 정국현상도 일어나 왕권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국하에 ‘탕평’이라는 용어를 정치무대에 처음 제기한 사람은 1683년(숙종 9) 박세채(朴世采)다. 그는 1694년에 영의정으로 또다시 탕평을 제기하였다. 그는 격렬해져 가는 노·소론간의 당쟁을 조정하려는 목적에서 파당(派黨)의 타파를 주장하였다.
그는 파당타파에 대한 이념을 <황극설>의 탕평에서 구하고 실천 방법으로 동서분당 초기 이이(李珥)가 주장했던 시비(是非)의 조정과 인물의 등용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가 곧 병사하자 당쟁조정을 위한 하나의 이념과 원칙으로 탕평을 처음 제기했다는 의미만 남겨놓았다. 그 뒤 소론의 재상 최석정(崔錫鼎)이 한 때 남인들을 조정에 등용시키려는 구실로 탕평을 표방했고, 또 숙종 자신도 비망기(備忘記)를 통해 여러 차례 탕평을 펼쳐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구호에만 그쳤으며, 그나마 1714년(숙종 40) 가례원류시말(家禮源流始末)로 노·소론간의 당쟁이 극대화된 이후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때는 탕평하려는 의지는 있었으나 그것을 하나의 이념이나 정책으로 실천할 수 있는 정치적인 기반은 조성되지 못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탕평이 다시 강조되고 그 이념을 하나의 정책으로까지 추진하는 정치집단이 형성되어서 탕평이 하나의 역사적인 용어로 확립된 것은 영조대였다.
영조는 당쟁의 폐해가 국가에 미치는 해악을 실감하였다. 그리고 세제책립과 대리청정(代理聽政)의 시비로 노·소론간의 분쟁이 격심해 신임사화라는 당화(黨禍)를 몰고 온 폐해를 직접 경험한 장본인이다. 따라서 탕평책은 이것을 반성하는 입장에서 나온 정치이념이요, 예방책이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때는 자신의 세제책립과 대리청정을 바라지 않던 소론의 영수 이광좌(李光佐)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바로 탕평책의 서곡인 당쟁의 폐해를 하교하였다. 이어 소론의 영수 김일경(金一鏡), 남인의 목호룡(睦虎龍)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자들을 숙청하였다. 그리고 1725년(영조 1) 을사처분(乙巳處分)으로 노론을 다시 조정에 불러 들였다.
그러나 영조 자신이 의도한 탕평정국(蕩平政局)의 바람과는 달리 노론의 강경파들이 소론을 공격하는 등 노·소론의 파쟁이 다시 고개를 들자 1727년에는 노론의 강경파들을 축출하였다. 곧 이어 1729년에는 기유처분(己酉處分)으로 노·소론내 온건론자들을 고르게 등용해 초기의 탕평책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 때 인사정책으로 타당을 견제시키는 쌍거호대(雙擧互對)의 방식을 취하였다.
즉, 노론을 영의정에 앉히면 좌의정은 소론으로 하여 이를 상대하게 하면서 그 밑의 청요직도 이와 같은 인사정책을 써서 서로를 견제하였다. 그리고 이들 인물의 기용도 각 파당내의 강경론자들을 배제하고 탕평론자들로 구성시켰다. 그 뒤 영조 자신의 의도대로 조정국면이 수습되자 이제는 쌍거호대의 인사방식을 지양하였다. 즉, 격렬해지는 당론을 수습하고자 인물의 현능(賢能)에 관계없이 파당에 따라 고르게 인물을 등용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완화된 정국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정국기반을 바탕으로 이제는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의 인사정책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정국이 전개되자 노론·소론·남인·소북 등 사색을 고루 등용했고, 이제 영조대 중반에 탕평국면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1742년(영조 18)에는 ‘붕당이 대개 홍문관의 관원을 뽑는 데 한 원인이 있다.’ 하여 그 전선(銓選)의 방법을 고치기도 하였다. 이것을 처음 주장한 자는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경연에 들어간 실학자 유수원(柳壽垣)이었다. 그는 이조(吏曹)의 관원 가운데 승문원에 들어갈 만한 자를 뽑아 시험을 보여 성적대로 차례로 홍문관정자에서부터 요직에 등용시키고, 모든 관제는 3년마다 차례로 승계시킨다는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을 주장하였다.
주장대로라면 홍문관의 이름 있는 관직에 대한 각 파당간의 경쟁도 없어지고 이조전랑의 통청권(通淸權)도 스스로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탕평론자 조현명은 이러한 서승법을 일반 관직보다는 이조의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과 대간(臺諫)의 통청에 특히 적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종래 이조전랑이 행사하던 언관의 통청권은 이조판서에게 돌아가고, 한천법(翰薦法)은 회권(會圈)으로 변해 재상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조전랑 통청권의 폐지와 한천법의 개혁은 결과적으로 선조대 이래 지속되어온 파당정치의 사실상의 붕괴를 의미하였다. 1742년 영조는“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원만해 편벽되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편벽해 원만하지 않음은 바로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라는 문구를 친히 지어 비(碑)에 새겨 성균관 반수교(泮水橋) 위에 세워 ‘탕평비(蕩平碑)’라 하였다. 한편으로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당론을 금하도록 계책하여 자신의 탕평정책에 대한 열의를 보여주었다.
영조는 초·중반기에는 완론탕평으로 파당간의 병진을 기본 바탕으로 하였다. 그러나 탕평정책기반의 확보과정에서 노론의 우위를 피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탕평책은 노·소론간에 청류(淸流)를 자처하는 강경파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며, 영조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혼인관계를 통해, 특히 온건한 노론계 대신들과 유대를 맺어 지지세력을 삼게 되었다.
영조는 파당간의 격심한 대립을 일단 수습했으나, 수습의 직접적인 수단을 혼인관계에서 찾았기 때문에 정국 운영에 척신(戚臣)의 비중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척신들은 영조대 중반에 ‘남당(南黨)’이라 불리면서 청류 세력인 ‘동당(東黨)’과 대립하였다.
한편, 장헌세자(莊獻世子 : 思悼世子)가 죽은 뒤 영조대 후반에 세손(世孫 : 뒤의 정조)의 보필 임무를 맡은 홍봉한(洪鳳漢) 등도 척신으로 ‘북당(北黨)’이라 하여 남당과 대립하였다. 북당은 세손 보필의 임무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남당으로부터는 노론 우위를 방기하고 시세에 편승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리하여 탕평정국을 다져온 가운데서도 내면으로는 당쟁의 파란이 계속되었다. 일례로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노론을 정계에 등장시켜 탕평정국을 급히 서두르다가 1728년에 정계에서 밀려난 소론·남인들의 반발세력이 주동이 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겪었다. 1755년에는 을사처분 때 귀양을 가서 20여 년 동안이나 한을 품어온 소론 윤지(尹志) 등이 주동이 되어 나주괘서사건을 일으켰다.
또, 이듬 해 토역과(討逆科)를 시행할 때 답안지에 소론계 인물들이 조정을 비방하는 글을 써서 물의를 일으켰다. 그 뒤 1762년에는 탕평책에 따라 다시 조정에 들어온 남인과 노론정권 위에 미약한 자리를 차지해온 소론 등이 장헌세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잡으려다가 이를 간파한 노론의 계교로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영조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척신으로 당을 이룬 남당과 북당, 그리고 청류를 자처하는 동당이 정국 구도를 이룬 가운데 즉위한 정조는 노론의 우위 여부를 문제삼는 기존의 두 척신당의 틈바구니에서 왕정체제확립의 한계를 직시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을 인식한 정조는 그 동안 두 척신당에 비판을 가해온 청류를 조정의 중심부로 끌어들여 이른바 청류 탕평을 펼쳤다.
청류는 영조말에 동당을 이루어 척신당을 비판하던 노론계인사, 즉 김종수(金鍾秀)·김치인(金致仁)·유언조(兪彦造)·윤시동(尹蓍東)·송인명(宋仁明)·정존겸(鄭存謙) 등이 주축이었다. 그러나 다른 당색도 배제하지 않은 채 정조 스스로 규장각 및 초계문신제도(抄啓文臣制度)를 통해 비노론계의 진출을 활성화시켜갔다.
1788년(정조 12)에는 채제공(蔡濟恭)을 비롯한 남인세력을 본격적으로 등용해 노론과 남인의 보합(保合)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이에 호응한 영남 남인들이 1792년에 그간 노론의 우위 아래 금기시해 온 임오의리문제(壬午義理問題)를 제기해 노론을 크게 당혹시키는 형세 변동이 일어났다. 노론내부의 시파(時派)·벽파(僻派)의 분열은 이러한 형세 변화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정조는 조제(調制)·보합의 인재 등용을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계승하면서 사대부의 의리와 명절(名節)을 중시해온 청류들을 대폭 기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노·소론 중에 온건론자들이 함께 지지하는 완론 탕평을 이끌어온 영조가 파당간의 병진을 기본 바탕으로 한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한편, 1788년에서 1795년 사이에 시·벽파가 표면화된 뒤 사색은 명색만 남고 정국이 완전히 이 두 파로 재편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 분립이 공공연해졌다. 특히 정조의 정책을 지지하는 시파의 부각에 위기를 느낀 벽파의 결집 및 공세가 두드러지는 경향이었다.
위와 같이 정조는 선왕의 뜻을 이어 받아 탕평의 조화에 힘썼으며, 그의 침실을 ‘탕탕평평실’이라 명명하고 사색을 고르게 등용해 당론의 융화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영·정조대에 꾀해진 탕평정책은 전제왕조대에 격렬한 파당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는 점에서 전대보다는 발전된 정책운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척족 세력을 한 수단으로 했고, 또 그로 말미암아 왕 자신이 철저히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하였다. 더욱이 사색등용정책에 따라 배제된 구 정치세력을 다시 불러들여 새로운 정쟁(政爭)을 낳게 하였다. 즉, 한 파당의 대립된 갈등을 근절하지 못했기에 후대에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빌미를 마련해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