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할아버지는 민유중(閔維重)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며, 어머니는 윤지선(尹趾善)의 딸이다.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 )의 조카이다.
1719년(숙종 45)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5년(영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1726년 설서(說書)를 거쳐, 검열(檢閱)·봉교(奉敎)·겸설서·한림(翰林) 등을 역임하였다.
1729년 정언(正言) 및 별겸춘추로서 정미환국 이후 노론의 거두인 아버지가 밀려나고 소론이던 이광좌(李光佐)가 좌의정으로 등장하게 된 사실을 신원(伸寃)하는 요건으로 이광좌를 소척하려 하였다가 이천현감으로 쫓겨났다.
그 뒤 1733년 부수찬이 되었으나, 다시 이광좌를 소척하다가 갑산(甲山)에 찬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 1735년 부교리·교리·부수찬 등을 거쳐, 1736년 승지·대사간·금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739년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러서, 동생 민통수(閔通洙)와 함께 다시 이광좌를 소척하다가 또 해남현에 찬배되었다. 뒤에 곧 풀려나 1740년 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이르렀다.
이 때 우의정 조현명의 유발(誘發)로 민형수가 위시(僞詩)를 신빙하고 있다고 인정되어 다시 국문을 받고 심적 고통을 받았으나, 당시 부사직으로서 동지사의 부사로 발탁되어 떠나면서도 그것을 해명하는 상소를 하였다.
1741년 형조참판을 거쳐, 함경감사 때는 북관의 진보(鎭堡) 설치에 힘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해청미 일만곡(一萬斛)을 진휼 구제를 위한 물자로 이용하였으며, 그 해 변경순방을 하다가 괴한에게 장살되었다. 일생을 통하여 영조의 탕평책에 어긋난 언행으로 아버지의 신원을 위하여 이광좌를 끈질기게 소척하려 하였고, 이로 인하여 자신이 또한 파란을 많이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