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宣陵)은 조선 제9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의 능이다. 왕릉과 비릉이 동서쪽 다른 언덕 위에 각각 조성되어 있어서 동원이강(同原異岡) 형식이다. 성종 선릉은 『국조오례의』에 가장 부합하게 건립한 조선 왕릉이며, 이후 16세기 왕릉 조영의 기준이 되었다. 사적 서울 선릉과 정릉으로 지정되어 있다.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691494)이 1494년 12월 24일에 승하하자 왕릉의 자리를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1444)의 묫자리로 정하고, 1495년 4월 안장하였다.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는 1530년 승하하자 성종릉 왼쪽 청룡 자락에 안장하였다.
성종릉은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의 유교(儒敎)를 따라 돌방을 만들지 않았으나, 대신들의 건의에 따라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41506)이 사대석(莎臺石)은 설치하게 하였다.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이 사대석을 해야 아름다우나 부서지게 되면 보수해야 하고 분묘가 요란스러워지니 미안하며, 사대석을 하지 않은 곳이 많으니 설치하지 않게 하였다. 그래서 정현왕후릉은 난간석(欄干石)만 설치되어 있다.
병풍석 건립 유무를 제외하면 성종릉과 정현왕후릉의 석물은 종류와 수량이 동일하다.
성종과 정현왕후의 선릉과 중종 정릉은 임진왜란 중인 1592년에서 1593년경 왜적에 의해 도굴되었다.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을 보면 성종릉과 정현왕후릉은 능 내부의 것을 모두 가져가고 재궁(梓宮, 관)을 불태웠다고 한다.
봉분 주위에 양석(羊石), 호석(虎石)이 있고, 곡담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과 장명등(長明燈)을 배치하고 좌우에 망주석(望柱石), 문석인(文石人), 무석인(武石人), 석마(石馬) 등을 세웠다. 동원이강일 경우 정자각(丁字閣)을 두 능의 중앙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선릉은 그대로 성종릉 앞에 두었다.
선릉에는 현재 정자각과 비각(碑閣), 수복방(守僕房), 홍살문 만이 남아 있지만 『 춘관통고(春官通考)』와 『선릉지』에는 이외에도 재실(齋室), 전사청(典祀廳), 제기고(祭器庫), 안향청(安香廳: 제사에 쓰는 향을 보관하는 곳) 등이 있었으며, 재실 인근에 연못도 있었다고 한다.
성종 선릉은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록된 석물(石物)의 구성과 규격에 맨 처음으로 부합하는 왕릉이다. 특히 성종 선릉 장명등 뚜껑돌에는 환기구가 위아래로 뚫려 있는데, 이것은 『국조오례의』를 반영한 결과이다. 석물의 규모가 장대해지는 것도 그 영향이며, 이후 16세기 조선 왕릉 석물의 규모가 대형으로 유지되는 이유이자 시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