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권 8책으로 된 인본(印本)이다. 다른 왕의 실록과 함께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은 광해군 시대에 북인(北人)에 속했던 기자헌(奇自獻) · 이이첨(李爾瞻)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것이다. 따라서 당파(黨派) 관계로 공정한 입장을 견지하지 못한 것이 많았다.
특히 서인(西人)으로 지목된 이이(李珥) · 성혼(成渾) · 박순(朴淳) · 정철(鄭澈) 및 남인(南人) 유성룡(柳成龍) 등에 대해 없는 사실을 꾸며서 비방했는가 하면, 이산해(李山海) · 이이첨 등 북인 일파에 대해서는 성인군자처럼 칭찬해 시비 선악이 많이 전도되었다.
그러므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북인이 물러가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곧 실록을 수정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다.
인조 즉위 초에 경연관(經筵官) 이수광(李睟光) · 임숙영(任叔英) 등이 수정할 것을 건의하고 좌의정 윤방(尹昉) 또한 이를 역설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루어오다가, 1641년(인조 19) 2월에 대제학 이식(李植)의 상소로 수정을 결의하고, 이식에게 수정을 전담시켰다.
이식이 수정을 시작한 것은 2년 뒤인 1643년(인조 21)부터이다. 그 해 7월에 이식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심세정(沈世鼎)을 대동하고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에 가서 『선조실록』 중 수정할 곳을 골라서 뽑아 왔다. 이후에 수정실록청(修正實錄廳)을 설치하고 가장 사초(家藏史草)와 비문 · 행장 및 야사(野史) · 잡기류(雜記類) 등을 수집해 수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646년(인조 24) 1월에 이식이 다른 일로 파면되고, 곧 사망하여 수정 사업은 중단되었다. 그 뒤 효종 즉위 초년에 여러 차례 수정 작업을 펴려 했으나, 실현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657년(효종 8) 3월에 이르러 수정실록청을 다시 설치하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육(金堉)과 채유후(蔡裕後) 등으로 하여금 계속 사업을 펴게 해 그 해 9월에 완성을 보았다.
이 수정실록은 1년을 1권으로 편찬했기 때문에 총 4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조 즉위년부터 29년까지의 30권은 이식이 편찬했고, 30년부터 41년까지의 12권은 채유후 등이 편찬하였다.
당쟁이 일어나기 이전의 실록은 비교적 직필(直筆)로 공정하게 편찬되었다. 그러나 당론(黨論)이 발생한 이후의 실록은 당시의 정권을 잡고 있던 당파에 유리하고 반대당에 불리하게 기록되어 있어 반대당이 정권을 잡게 되면 이를 수정해 다른 실록을 편찬하는 예가 종종 있게 되었다. 『선조수정실록』 외에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 등이 나타나게 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수정실록이 나왔다고 하여 전에 편찬한 실록을 파기하지 않고 함께 보존한 것은 잘한 일이다. 이 실록은 1955∼1958년에 걸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왕조실록』 전질을 영인, 간행함에 따라 널리 보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