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8년(정조 2)에 편찬을 시작하여 1781년 7월에 완성, 간행하였다. 영조 때 완성된 『경종실록』은 소론인 이집 · 조문명(趙文命) · 이덕수(李德壽) · 서명균(徐命均)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하였기 때문에 노론에게 불리한 내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었다. 특히 경종 원년(1721) · 2년(1722)에 일어난 신임옥사(辛壬獄事)에 대한 왜곡이 의혹을 샀다.
1778년 『영조실록(英祖實錄)』을 편찬할 때 이사렴(李師濂) · 유당(柳戇) 등이 상소하여 신임옥사에 관련된 시비(是非)가 공정하지 않음을 지적하였고, 과거 『선조수정실록』과 『현종개수실록』의 전례를 근거로 『경종실록』을 수정 · 편찬하기를 건의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건의를 수용하여 실록을 수정 · 편찬하기로 결정하고, 이해 2월에 『영조실록』과 함께 편찬하기 시작하여 1781년(정조 5) 7월에 완성하였다.
『경종실록』의 수정 명분은 실록청 도청 당상에 임명되었던 병조판서 이휘지(李徽之)의 종부(從父)가 신임사화 때 화를 입은 노론 4대신(四大臣) 중 이건명(李健命)이므로 공정한 역사 편찬이 어렵다며 사의를 표명한 데서 잘 나타난다. 영조 대에 있었던 충역(忠逆) 논의를 역사적으로 정리하자는 제안이었다.
『경종실록』의 수정을 건의하였던 이사렴은 예문관에 봉직할 때, 태백산사고에 있는 실록을 폭서(曝書)하다가 『경종실록』을 보았다. 이사렴은 『경종실록』에서 사대신의 곧은 충성과 위대한 의열은 만고의 악한 반역이라고 배척하고, 조태구(趙泰耈), 최석항(崔錫恒) 등 흉악한 역적의 괴수(魁首)는 마음을 다하여 종묘사직을 지탱한 것으로 높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속명의록』 편찬이 끝나갈 무렵에 『경종실록』을 수정하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영조실록』의 편찬과 『경종실록』의 수정 중에서 어떤 쪽을 먼저 거행할 것인지를 놓고 논란을 벌이던 중, 일단 동시에 거행하기로 하고 도청과 삼방의 당상과 낭청을 임명하여 실록 편찬을 시작하였다. 이때 설치한 실록청은 얼마 뒤에 용호영(龍虎營)으로 다시 옮겼다.
실록의 수정에 참여한 관원은 총재관(摠裁官) 정존겸(鄭存謙), 도청당상(都廳堂上) 채제공(蔡濟恭), 황경원(黃景源), 조준(趙埈), 이명식(李命植), 윤시동(尹蓍東), 김이소(金履素), 도청낭청(都廳郞廳) 박천형(朴天衡), 황승원(黃昇源), 유의(柳誼), 홍명호(洪明浩), 분판낭청(粉板郞廳) 이수함(李壽咸), 이일운(李日運), 박장설(朴長卨), 이익수(李益洙), 이지형(李之珩), 이만영(李萬榮), 김용(金鎔), 윤확, 유악주(兪岳柱), 유언수(兪彦脩), 김광악(金光岳), 한광식(韓光植) 등이다.
『경종실록』 가운데 수정 대상이 되었던 주요 사건은 1721년(경종1년) 왕세제 건저(建儲)와 청정(聽政), 그에 이은 김일경(金一鏡)의 옥사, 이듬해 목호룡(睦虎龍)의 고변과 노론 4대신의 죽음, 윤선거(尹宣擧) 부자의 복권과 송시열(宋時烈)의 도봉서원(道峯書院) 출향(黜享) 등이었다.
『경종실록』 편찬자나 수정 편찬자는 왕세제 건저와 청정에 상호 인식 차를 보이지만, 이 사태가 신임사화로 연결되어 노론 사대신이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은 지나치다고 보았다. 김일경의 옥사와 목호룡 고변에 대해서도 무옥(誣獄)이라는 관점을 두 실록 모두 견지하고 있었다. 송시열의 출향 역시 과도한 조치로 시비가 정확하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이는 신임사화에 대해 무옥이라는 인식의 공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동시에 역사 기록에 반영된 탕평(蕩平)의 흔적으로 보인다.
한편 『경종실록』 수정이 끝나자 구본(舊本)의 폐기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1779년 7월, 경연관(經筵官) 송덕상(宋德相)은 『경종실록』의 수정본이 편찬되면 구본은 없애버리자고 했다. 그러나 정조는 우리나라에서도 정본과 구본을 함께 남겨 둔 일이 있었고, 고례(古例)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음을 이유로 들어 구본 폐기를 반대하였다. 송나라 때에 범조우(范祖禹)가 수찬한 사서(史書)로 말하면, 장돈(章惇), 채변(蔡卞) 등이 또 다시 고치고 그 뒤에 범충(范沖)이 다시 바로 잡았는데 전후의 두 본이 또한 함께 유행하였고 그때 사람들이 ‘주묵사(朱墨史)’라 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현재 『경종실록』과 『경종수정실록』 두 본이 함께 전하는 것이다. 이는 『선조실록』의 수정부터 내려온 조선 후기 실록 수정의 기본 원칙을 준수하는 일이었으며, 원본과 수정본을 모두 남김으로써 역사의 평가를 객관화하는 당대의 역사 의식 수준을 보여준다.
1930년대 이후 조선 역대 왕(태조∼철종)의 실록이 몇 차례 영인 될 때, 이 실록도 함께 간행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국역본을 출간하였고,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국역, 원문 이미지, 표점 원문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