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건중(楗仲). 이준(李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겸저(李謙著)이다. 아버지는 이정(李淨)이며, 어머니는 심익성(沈益成)의 딸이다.
1751년(영조 2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753년 검열이 되었다가 1757년(영조 33) 고부사(告赴使)의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와 문학(文學)이 되었다. 이듬해 어사(御史)로 안동의 안필(安弼)의 옥사를 조사하였다. 1763년에 부교리·교리·사헌부의 집의가 되어, 서울에 있는 승니(僧尼)를 쫓아내도록 청했다.
이듬해 선교관(宣敎官)이 되었으나 갑산부에 귀양이 명해졌다가 다시 교리·승지가 되었다. 1765년 대사간을 거쳐, 1767년 수원부사가 되었으나 마병(馬兵)을 허술히 관리한 죄로 파직되었다. 1769년에 승지가 되고,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 이어 이조참의에 올랐다가 대사간이 되었다.
1771년(영조 47)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김소사(金召史)와 논쟁한 일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승지·이조참의, 1773년 대사간을 거쳐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다. 1777년(정조 1)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어 대사헌이 되었다가, 동지 겸 사은정사의 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공충도관찰사(公忠道觀察使), 1779년 경기관찰사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다.
이어 함경도관찰사·호조참판·한성부판윤, 공조판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실록교정당상(實錄校正堂上), 홍문관제학·형조판서, 의금부사·예조판서·이조판서·병조판서, 좌참찬을 지낸 뒤 1782년 숭록대부(崇菉大夫)가 되었다. 1783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패소(牌召: 임금이 패를 내려 신하를 부르던 제도)를 어겨 파직되었으나 곧 한성부판윤에 다시 임용되었다.
다시 함경도관찰사·판의금부사·공조판서·이조판서·형조판서·비변사당상·의정부좌참찬·개성부유수·병조판서·의정부우참찬·예조판서, 가례도감(嘉禮都監)의 제조가 되었다. 1788년에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환곡과 그 발매의 폐단을 아뢰었다.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이 때 시파(時派)로 분류되었다.
이듬해 지중추부사·판의금부사·예문관제학을 거쳐, 1793년 수원부유수가 되어 공도회(公都會: 관찰사나 유수가 지방의 유생들을 뽑는 소과의 초시)를 개정하였다. 다시 병조판서·판중추부사·선혜청당상이 되어 진휼용 상진곡(常賑穀: 상평청과 진휼청의 소관 곡물)의 감소와 대처 방안을 상소했다.
1797년 판돈녕부사·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800년에 졸하자 임금이 조문과 제사를 관례에 따라 거행토록 전교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