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덕이(德以). 강진(姜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재창(姜再昌)이고, 아버지는 강이일(姜履一)이며, 어머니는 임응원(任應元)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병치료를 위하여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이기도 하였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1747년(영조 2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의 별검이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758년 예조좌랑, 이듬해 지평(持平) · 장령(掌令) 등에 제수되었으나 어머니의 노환을 이유로 모두 사퇴하였고, 당시 영남지방에서 곡식매매에 관한 폐단이 심해지자 이에 대한 시정을 상소하였다.
1762년 은산현감과 세손서강원필선(世孫講書院弼善)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다. 뒤에 어머니의 상을 벗은 뒤에도 수찬(修撰) · 교리(校理) · 집의(執義) · 강계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정조가 능력을 높이 사서 1779년 승지의 직함을 내리고 이듬해에는 홍충도(洪忠道: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하였지만, 나이가 많아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고 사퇴하였다. 이에 정조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의 건의에 따라 교체하고 말았다.
원래 과거를 보고 벼슬 길에 들어설 때부터는 정의공도(正義公道)에 살고자 하였으며, 후에 자신의 성품이 관직에 맞지 않는다 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호)를 흠모, 자신의 생활은 ‘퇴(退)’자의 의미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며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