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백상(伯常), 호는 방한(方閒). 예조판서 윤세기(尹世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식(尹湜)이다. 아버지는 윤득민(尹得民)이며, 어머니는 조정빈(趙鼎彬)의 딸이다.
1754년(영조 30) 25세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설서가 되었고, 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756년 당론을 일으켰다고 탄핵을 받아 7년간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가 풀려났고, 그 뒤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기민구제에 공헌하였다.
1766년 대사간이 되자 신광집(申光緝)의 무죄를 논하다가 다시 전리에 방축되었고, 1772년 갑산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3년 후에는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대사성·부제학을 거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경기도관찰사로 재직 시 당론을 논하다가 다시 남해현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그 뒤 개성유수로 발탁되었다. 형조판서로 있을 때 당론을 다시 논하다가 삼화로 유배되었고, 이듬해인 1787년(정조 11) 풀려나서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김종수(金鍾秀)·심환지(沈煥之) 등과 함께 정치활동을 하였다. 1795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나라의 고사(故事)를 잘 알았고 군국(軍國)의 기무(機務)에 정통하였으며, 개성이 뚜렷하여 옳다고 생각하던 당론을 일삼았기 때문에 파란많은 생애를 보냈다. 편저로는 『향례합편(鄕禮合編)』이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