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유중(柔仲), 호는 남일(南逸) 또는 퇴암(退庵). 박임종(朴林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조년(朴兆年)이고, 아버지는 사간 박소(朴紹)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홍사부(洪士俯)의 딸이다.
8살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와서 유조인(柳祖訒)에게 배웠고, 뒤에 성제원(成悌元)·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3년(명종 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과 육조의 참의·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 국정을 전단하던 이량(李樑)의 죄를 탄핵하다가 귀양갔으나 왕이 특별히 용서하여 풀려났다. 명종이 임종할 때 좌승지로 금중(禁中)에서 숙직하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 함께 고명을 받아 선조가 왕위를 계승하는 데 공을 세웠다.
심의겸(沈義謙)과 친교가 두터워 조카딸(朴應順의 딸)을 선조비로 책봉하도록 하였으며, 궁중의 복색을 화사하고 선명한 것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이이(李珥)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고지식하며 말을 과감히 하고 겉으로는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는 듯하나 속으로는 시비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었다.”고 평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였기 때문에 대사헌 재임 중 기탄없는 논박을 하여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왕비의 숙부였으므로 왕의 총애를 받으니 사림(士林)의 큰 힘이 되었고, 박응남이 죽자 사류(士類)들이 애석하게 여겼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