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현숙(見叔).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고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는 것을 좋아하였다. 1616년(광해군 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된 이후 도총부도사·조산만호(造山萬戶)를 역임하였다. 소근진수군첨절제사(所斤鎭水軍僉節制使)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을 만났다.
형 박성룡(朴成龍)과 함께 부원수 이수일(李守一)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고, 고부군수(古阜郡守)로 부임하였다.
군수 재임시 북방 오랑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북방으로 보내달라고 여러 번 상소하니, 조정에서는 이를 갸륵하게 여겨 평안도병마우후로 임명하고, 평안도병마절도사 남이홍(南以洪)의 휘하에 있게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금나라 군이 항장(降將) 강홍립(姜弘立)과 정난영(鄭蘭英)을 앞세우고 쳐들어와 의주(義州)가 함락되고 안주(安州)에 다다라 화친을 청하였을 때, “싸움이 있을 뿐 화해란 없다.”고 말하고 수백 명밖에 안 되는 군민(軍民)을 이끌고 싸웠다.
혼자 성 위에 올라가 활을 들고 수백 명의 적을 사살하였고, 활을 쏠 수 없게 되자 칼을 들고 적과 맞서 많은 적을 사살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사하였다.
난이 끝난 뒤 인조는 박명룡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서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안주에 충민사(忠愍祠)를 세워 제향하였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