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계순(季順). 할아버지는 박호원(朴好元)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 박정현(朴鼎賢)이며, 어머니는 김급(金汲)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고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성균관의 유생들을 이끌고 이에 항소(抗疏)하였다.
1621년 정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제수받았으나, 이이첨(李爾瞻)의 농간으로 3년 동안이나 부임하지 못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해미현감으로 발탁되어 많은 공적을 남겼다.
1627년에는 지평(持平)이 되었고 4년 뒤에는 장령(掌令)이 되었으며, 1632년에 인조의 사친(私親) 추숭(追崇)을 논의할 때 이를 반대하다가 이조판서 이귀(李貴)의 상소로 목천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수찬(修撰)과 사헌부의 벼슬을 지내고, 1650년(효종 1) 다시 수찬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종성부사가 되었다.
2년 뒤에 서울로 돌아와 동부승지·판결사를 지내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충주목사가 되었다. 1659년(현종 1) 병조참의에 임명, 재직 중 죽었다. 효우(孝友)를 늘 강조하였고 재물을 탐내지 않았으며 사치를 싫어하였고 사서(史書) 읽기를 좋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