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명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숙장(叔章)
학암(鶴巖)
시호
문충(文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80년(숙종 6)
사망 연도
1732년(영조 8)
본관
풍양(豊壤)
주요 관직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
정의
조선 후기에,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숙장(叔章), 호는 학암(鶴巖). 조형(趙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상정(趙相鼎)이고, 아버지는 도사(都事) 조인수(趙仁壽)이다. 어머니는 김만균(金萬均)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05년(숙종 31) 생원시에 합격하고 17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었다. 1721년(경종 1) 수찬을 거쳐 부교리가 되어 붕당의 폐해를 통열히 논했고, 문학(文學)으로 옮겨 마침 왕세제로 책봉된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의 보호에 힘쓰면서 김일경(金一鏡) 중심의 소론 과격파(峻少)에 대립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지평으로 발탁되어 겸동학교수(兼東學敎授)·세자시강원겸보덕(世子侍講院兼輔德)을 지냈다. 다음 해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에 승진되어 파붕당(破朋黨)의 설을 제창하다가 민진원(閔鎭遠)의 배척을 받았다.

이어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진출하면서 이조참의에 특별히 임명되었다. 그 해 딸이 왕세자(영조의 제1자, 사후에 孝章世子라 불림)의 빈(嬪)이 되자 호조참판과 도승지에 올라 수어사·어영대장을 겸했으며, 이듬해이인좌(李麟佐)의 난 진압에 공이 있다 하여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輸忠竭誠決機效力奮武功臣) 2등에 녹훈, 풍릉군(豐陵君)에 책봉되고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에 이조참판 송인명(宋寅明)과 함께 탕평론을 재천명했고, 이후 대제학 이조판서를 거쳐 1730년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이 후 『경종실록』 총재관(總裁官)으로서 이를 완성,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본래 소론가문 출신이었지만 당쟁의 폐를 걱정하여 붕당의 타파와 공평무사한 탕평의 실현을 정치 목표로 하였다. 또, 억강부약(抑强扶弱)과 시비절충(是非折衷)·쌍거호대(雙擧互對)를 그 실천 방안으로 제시하였다.

온건론자 중심의 노·소 연립정권을 구축하는 데 주력, 노·소론의 준론자(峻論者)들로부터 세상사람을 속이고 우롱한다는 배척까지 받았지만, 영조 초의 소론계의 반란[李麟佐의 亂]과 계속되는 역모 적발로 불안했던 왕권의 안정과 확립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또,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의 폐지, 조운수로(漕運水路)의 편의를 위한 안흥목[安興項]의 개척, 주전(鑄錢)의 필요성 역설 등과 같이 민생 문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소론이면서도 외가(光山金氏 萬均)와 처가(安東金氏 昌業)가 노론 집안이어서 노론계 명사와 널리 교유하였다. 특히 송인명, 김재로(金在魯) 등과 매우 친밀하였다. 후일 영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글씨에 능하여 청주 삼충사사적비(三忠祠事蹟碑)·북백곽재우묘표(北伯郭再祐墓表) 등이 전하고, 『학암집』 4책이 남아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
『경종실록』
『영조실록』
『국조방목』
『학암집(鶴巖集)』
『당의통략(黨議通略)』
「한국당쟁사」(성낙훈, 『한국문화사대계』 Ⅱ,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5)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정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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