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 ()

조형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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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좌참찬, 예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군헌(君獻)
취병(翠屛)
시호
충정(忠貞)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06년(선조 39)
사망 연도
1679년(숙종 5)
본관
풍양(豊壤)
주요 관직
좌참찬|형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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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좌참찬, 예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군헌(君獻), 호는 취병(翠屛). 조세훈(趙世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조기(趙磯)이고, 아버지는 승지 조희보(趙希輔)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26년(인조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파방되고, 163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대교를 거쳐 사국(史局)으로 옮겼다.

1632년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추존하자는 박지계(朴知誡)의 발의에 반대하여 인조의 미움을 받아 부여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임금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고, 이듬해 환도하여 병조좌랑이 되었다.

1642년 지제교에 선임되고, 이듬해 부교리 · 수찬을 지냈으며, 그 이듬해 헌납 · 이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646년 다시 헌납이 되었으나 1636년의 중시별과가 파방되는 사건이 발생, 당시 참시관(參試官)으로서 책임을 물어 파직되었다.

1647년 집의가 되고, 뒤에 춘추관편수관으로 『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51년(효종 2)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와 보덕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충청감사를 거쳐 1653년 정신옹주(貞愼翁主: 선조의 딸)의 예장(禮葬) 때 역군가(役軍價) 문제로 정배되고, 이듬해 풀려나 승지가 되었다.

1655년 대사간이 되어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오고, 1657년 도승지 · 대사간이 되었다. 그 뒤 1659년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 성균관좨주 송준길(宋浚吉)과 사학규제(四學規制)를 마련했으며,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경기감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형조판서가 되고, 1661년(현종 2) 공조판서 · 대사헌 ·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형조판서 재직 시 이갑남(李甲男)의 죄를 잘못 처리했다 하여 평산 금암역(金巖驛)으로 귀양갔다. 1663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판윤이 되었다. 이 때 동대문 밖 금산(禁山)의 소나무 남벌 사건에 관련되어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 1665년 지의금부사 · 우참찬을 거쳐 이듬해 공조판서를 지낸 뒤, 1668년 좌참찬이 되었다.

1669년 평안도 외방별시의 시관이 되고, 이듬해 좌참찬, 1673년 예조판서로서 판의금부사를 겸하다가 다시 좌참찬을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1674년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여 양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풀려나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효종실록』
『현종실록』
『국조방목』
『국조인물고』
『청선고(淸選考)』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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