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석신주사건 ()

조선시대사
사건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윤방이 종묘(宗廟)의 신주를 모독한 사건.
정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윤방이 종묘(宗廟)의 신주를 모독한 사건.
개설

공석신주사건(空石神主事件)은 1638년(인조 16) 1월 대사헌 유백증(兪伯曾, 1587~1646)이 상소하여 영부사 윤방(尹昉, 1563~1640)을 탄핵한 사건으로, 유백증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로 피난할 때에 종묘의 신주를 소홀히 다룬 윤방의 행위를 폭로하였다. 결국 윤방은 삭탈관직되었고 유배되었다.

경과

윤방은 병자호란 당시 묘사제조(廟社提調)로서 40여 신주(神主)를 모시고 빈궁(嬪宮),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강화로 피난하였다. 그런데 윤방이 강화도에서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나올 때, 노비의 헌옷 및 걸레 등과 함께 신주를 가마니[空石]에 넣어 말 위에 싣고는 다시 그 위에 계집종을 태웠었다.

인조는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당시의 광경을 보았다는 궁관에게 유백증의 상소 내용을 물어보게 하였다. 승정원은 궁관 서상리(徐祥履)와 조문수(曺文秀)를 통해 이 사실을 알아보았다. 이때 서상리는 자신이 병석에 있었다는 사실과 윤방이 온다는 말을 듣고 병석에서 일어났지만, 그런 일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하였다.

조문수는 필선(弼善)으로 세자를 배종하여 탄천(炭川)에 있었다고 하였다. 즉, 그는 윤방이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오자 세자가 곧 윤방을 인견하고 이어 궁관과 익위사(翊衛司) 관원 각 1인으로 신주를 모시도록 하고, 자신과 부솔(副率) 이헌국(李獻國)은 신주가 놓인 곳에 갔는데 신주가 빈 가마니에 쌓여 있었다고 하였다.

이에 신주가 빈 가마니에 놓이게 된 경위를 묻자 윤방은 “적병들의 수색이 매우 심해 지극히 미안한 일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였다.”고 대답하면서 자신은 신주를 다른 가마니에 옮겨 모시고 들어왔을 뿐, 계집종이 말을 타고 있었다는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진술하였다.

이들의 말을 모두 전해 들은인조는 유백증의 말이 과장되고 또 몹시 해괴하다며 우선 파직시키고 다시 추고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간관들이 유백증의 말은 그의 성품이 그럴 뿐 남을 해치려 한 것은 아니라며 용서를 빌었다. 이로 인해 결국 윤방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1639년(인조 17) 연안에 유배되었다.

의의와 평가

왕실 권위의 상징성을 보존한다는 차원에서 중요한 일에 적절히 대처해야함을 보여주는 측면과 함께 당시 윤방, 김류 등 주화파(主和派)에 대해 척화파(斥和派)의 비판이었다는 측면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취헌소차(翠軒疏箚)』
규장각한국학연구원(kyujanggak.snu.ac.kr)
집필자
이봉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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