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여길(汝吉). 서엄(徐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서 서성(徐渻)이고, 아버지는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 서경수(徐景需)이다. 어머니는 김희(金僖)의 딸이다.
인조 때 유생전강(儒生殿講)에서 장원,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630년(인조 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분관(分館)되었다가 여러 조(曹)의 낭관(郎官)을 거쳐 시강원(侍講院)에 보직되고, 1635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세자시강원의 관원으로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호란 뒤 원종(元宗: 인조의 아버지)의 부묘(祔廟)를 적극 주장하여 인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 뒤 사헌부의 지평(持平)·장령(掌令), 사간을 거쳐 경성판관(鏡城判官)에 특배(特拜)되었고, 홍문관의 교리(校理)·수찬(修撰) 등 청요직(淸要職)에 올랐다.
1644년 청나라에 볼모로 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일시 귀국했다가 심양(瀋陽)으로 다시 돌아갈 때 세자시강원의 보덕(輔德)으로 임명되어 수행한 후 세자와 함께 돌아왔다.
이듬해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갑자기 사망해 사대부(士大夫)의 상례(喪禮)로 장례 절차가 결정되자 『예경(禮經)』에 따라 세자의 예로 장사할 것을 주장, 실행하게 하였다.
그 뒤 부교리·사간 등을 거쳐 1646년 별시 문과의 참시관(參試官)이 되었다가 시권(試券) 가운데 옛날 사건을 인용해 지금의 재상자(在上者)를 기만(譏慢)한 사건이 일어나 파직되었다가 곧 외직인 경성(鏡城)·양주(楊州)·남원(南原) 등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필선을 거쳐 동부승지로 있다가 1652년(효종 3) 경주목사(慶州牧使)를 지내고, 다시 돌아와 예조참의·동부승지·병조참의에 승서되었다. 1655년 종성부사(鍾城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이듬해 승지에 제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