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방은 조선시대 형조판서, 우참판,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63년(명종 18)에 태어나 1640년(인조 18)에 사망했다. 1582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아버지 윤두수가 유배되자 사직하였다가 다시 기용되어 임진왜란 때에 선조를 호종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인목대비 폐모론이 제기되자 사직하였는데 인조반정 이후 예조판서와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정묘호란 때에 인조의 피난을 주장해 강화에 호종했고 병자호란 때에는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봉림대군과 함께 강화로 피난하였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임명되고, 이어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봉교 · 예조 좌랑이 되었다.
곧 사헌부 정언으로 옮겨 병조판서 이양원(李陽元)의 인사 부정을 탄핵하다가 성균관 전적으로 체직되었다. 1591년 당쟁으로 아버지가 유배당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아버지가 재상으로 다시 기용되자, 예조 정랑으로 발탁되어 선조를 호종하였다.
이어 병조정랑을 거쳐 특명으로 곧 기복(起復)해 홍문관 수찬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냈다. 그 뒤 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응교에 올랐으며, 당시 왜적의 만행이 극심한 중에도 몰래 숨어서 어머니 빈소에 다녀오는 효성을 보였다.
곧 직강 · 사예가 되고, 다시 당론이 일어나 아버지가 파직당하자 스스로 파직을 요청해 대각(臺閣)에서 물러났다가 곧 군기시 첨정에 제수되었다. 이어 경상도순안어사(慶尙道巡按御史)로 나가 치적을 올리고, 군기감정(軍器監正) · 평산부사를 거쳐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끝나자 추관(推官)으로 활약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순안독찰(巡按督察)이 되어 군량 운반을 담당하고, 곧 철원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동부승지로 승진되어 돌아오자 그 곳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덕을 기렸다.
1601년 부친상을 마친 뒤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곧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병조 참판 겸 동지춘추관사에 보임되었다가 도승지로 전직되었고, 다시 한성판윤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올랐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형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경기도 · 경상도의 감사를 지냈다.
이어 겸지춘추관사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615년(광해군 7) 다시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해 폐모론이 있자 병을 핑계로 정청(政廳)에 불참해 탄핵을 받고 사직, 은퇴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예조판서로 등용되고, 이어 우참판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하다가 곧 우의정에 올랐다.
다시 좌의정으로 있을 때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 민심 수습에 공헌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영의정이 되었다. 그 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피난을 주장해 강화에 호종하였고, 영의정에서 물러나 판중추부사를 역임한 후 1631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묘사제조(廟社提調)로서 40여 신주(神主)를 모시고 빈궁(嬪宮) · 봉림대군(鳳林大君: 훗날의 효종)과 함께 강화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신주 봉안에 잘못이 있었다는 탄핵을 받고 1639년 연안에 유배되었다가, 2개월 후 풀려나 다시 영중추부사에 기용되었다. 인품이 중후하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저서로는 『치천집』이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