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춘(伯春), 호는 노저(鷺渚). 정종의 아들인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의 현손이며, 병산부수(屛山副守) 이말정(李末丁)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지산령(知山令) 이천수(李千壽)이고, 아버지는 이원부령(利原副令) 이학정(李鶴汀)이며, 어머니는 정역(鄭㻛)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저작(著作)을 거쳐 1563년(명종 18)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 해에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객사한 정사(正使) 김주(金澍)를 대신해, 명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가 고려의 이인임(李仁任)으로 잘못 기재된 것을 이자춘(李子春)으로 바로잡고 돌아와 그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그 뒤 평안도·충청도·경기도의 관찰사, 형조판서·대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하고,1590년(선조 23)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우의정에 승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수도의 수비를 맡았으나 한강 방어의 실패로 양주(楊州)로 철수, 분군(分軍)의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과 함경도병마절도사 이혼(李渾)의 군사와 합세해 해유령(蟹踰嶺)에 주둔,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뒤 영의정에 올랐다.
이 때 의주에 피난해 있던 선조가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내부(內附: 딴 나라에 들어가 붙음)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탄식하며 8일간 단식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한다. 어릴 적에 이중호(李仲虎)에게 수학하였다. 성품이 충후하고 박학했으며, 흑백의 논쟁에 치우치지 않았고 시문에도 매우 능했다 한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